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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물이 모여든 곳에 남은 5대 보물 ‘물걸리사지(物傑理寺址)’

  • 기사입력 2018.08.24 13:28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 : 홍천 물걸리사지(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호), 불대좌(보물 제543호),불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 삼층석탑(보물 제545호))
소재지 :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강원도 태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영서와 영동을 오가며 문화재를 둘러보면 절터를 만난다. 인제와 양양 사이의 조침령을 넘어 양양으로 향하면 선림원지가 있다. 이곳에는 보물급 석조물이 절터에 가득 넘친다. 선림원지에서 가까운 진전사지에 이르면 석탑과 승탑이 있다. 다시 조침령을 넘어 홍천 내촌면 물걸리에 이르면 절명을 알 수 없는 절터에 불상과 광배, 석탑 등이 가득 차 있다. 절명을 알 수 없으니 이곳 지명을 빌려 ‘물걸리사지’라고 부르고 있다.

▲ 물걸리사지



사지란 예전에 절이 있었던 곳을 일컫는다. 유난히도 많은 옛 절터, 비록 지난날의 명성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들이 남아 있어 시대별 불교의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찾아낸다. 많은 절터 중에 꼭꼭 숨어 있는 절터가 ‘물걸리사지’이다.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곳을 물으면 물걸리사지를 일컫는다.

▲ 수습된 석물



언제 이곳에 절이 들어서게 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통일신라시대의 홍양사(洪陽寺)로 추정할 뿐이다. 발굴과정을 거치면서 명문이 들어있는 기왓장이나 석재물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명칭이나 사찰의 내력도 밝히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추측에 의존할 뿐이다. ‘물걸리(物傑里)’란 지명은 ‘민물이 모여 드는 곳’이란 뜻이다. 옛날에는 이곳을 ‘동창(東倉)’이라 불렀다. 즉 홍천의 동쪽에서 영서 지방과 영동지방의 각종 생산물이 모이던 곳으로, 조세를 보관하던 곳이었다고 하여 동창이란 지명을 가졌다. 물걸리의 남쪽에는 내촌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물줄기는 삼신산계곡에서 발원되어 청평호를 흘러들어간다.

▲ 수습된 기와파편


1967년 4월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장 1점과 고려 철불 조각 4점이 발견되었다. 4년 뒤인 1971년에 발굴조사과정에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호), 불대좌(보물 제543호), 불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 삼층석탑(보물 제545호) 등이 발굴되었다. 또한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각종 기와조각과 조선시대 백자조각 등이 발견됨으로써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절이 유지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보물급 유물들은 불교미술의 전성기를 이뤘던 통일신라의 솜씨를 규모나 기법면에서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고 섬세함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보호각 내의 석조여래좌상 외 3점의 유물은 조각솜씨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보물 제541호인 석조여래좌상은 팔각의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담한 크기와 온화한 인상을 준다. 조선총독부에서 1942년에 간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화강암제 좌상으로 연화좌가 있고 높이는 1구가 5척 7촌으로 완전하며 다른 1구는 3척 7촌으로 목이 부러져 있으나 조각은 모두 정교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는 상대와 중대, 하대로 구성된 팔각 연화대좌이다. 하대석은 팔각의 받침대와 8엽의 복련이 둘러져 있고, 받침대에는 각 면에 측연화문 내에 향로와 가릉빈가가 조각되어 있다. 각 모서리마다 귀꽃이 장식되어 화려함을 강조하였다. 2단의 굄 위에 있는 중대석은 각 면마다 우주를 새기고 각 면에 8구의 신장상(神將像)을 양각하였다. 신장상은 원형의 광배를 갖추고 있으나 마멸이 심해 광배내의 문양을 확인할 수 없다. 상대석은 연판 안에 꽃문양인 단판앙련을 3중으로 돌려 새겼다.

▲ 석조여래좌상


불상 머리의 나발은 뚜렷하지 않으며, 육계는 머리와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얼굴은 둥근 편이며 눈, 코, 입의 마모가 심해 원래의 표정을 알 수 없지만 온화한 인상을 준다. 어깨는 좁은 편으로 각이 지고 왜소하고 평판적인 느낌을 준다. 양쪽 어깨에는 통경의 법의를 걸치고, 가슴 위에는 수평으로 입은 내의와 띠 매듭이 보이며 아래에는 주름을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형식화된 옷 주름은 양쪽 팔과 결가부좌한 두 다리 위에 보이며 두 다리 사이에 모여진 삼각형태의 옷 주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두고 아래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왼쪽 다리 위에 수평으로 두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모든 악귀를 물리치고 이를 땅의 신을 불러 증명하였다는 데에서 유래된 것으로 주로 석가모니불이 취하는 손모양이다.

▲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2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洪川物傑里石造毘盧遮那佛坐像)은 약간 위축되어 보이는 신체, 무겁게 처리된 형식화된 옷 주름, 3단의 연화대좌가 그 특징을 말해준다. 상대, 중대, 하대로 구성된 대좌는 팔각연화좌로 석가여래좌상의 대좌와 함께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형식이다. 하대는 복판복련을 8엽으로 둘렀고 그 위로 2단의 굄이 중대를 받치고 있다. 8각의 중대석 모서리에는 우주를 새기고 그 사이 각 면에는 향로 1개와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공양상 2구, 불입상 5구를 양각하였다. 상대는 반구형의 앙련을 2단으로 새겼고 각 연판문에는 다양한 꽃문양을 장식하여 화려한 느낌을 준다.

불상의 머리 나발이 표현된 머리 위에 불쑥 올라온 육계가 있으며, 코가 마멸되어 세부 표정을 가름하기 어렵다. 눈과 코, 입은 작고 이마가 좁으며 상대적으로 두 볼이 살쪄 보인다. 목은 어깨와 거의 붙어 있는 듯 짧은 편이고 가슴이 넓어 보이지만 양감이 줄어든 느낌을 준다.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경의 법의를 걸쳤으며 양쪽 소매와 결가부좌한 두 다리 위에는 일률적으로 표현된 평행의 굵은 옷 주름 선을 표현하였다.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으로 오른손의 둘째손가락을 감싸고 있어 일반적인 지권인 형태와는 다르게 손의 좌우가 바뀌어 있다. 지권인은 주로 비로자나불상이 취하는 손모양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권인은 통일신라시대의 비로자나불상 중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진주 한산사 석조비로자나불상, 밀양 천황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등 대부분 9세기경에 조성된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이다.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약간 위축된 신체표현, 무겁게 처리된 형식화된 옷 주름 표현, 3단으로 구성된 연화대좌 등에서 9세기경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보물 제544호인 석조대좌 및 광배는 팔각의 연화대좌 위에 배 모양의 주형광배(舟形光背)가 놓여 져 있다. 1967년 신축공사 때 금동불상 1점과 함께 발견된 것이다. 당시만 하여도 절터 주변은 논과 밭이었으며, 많은 기와조각도 함께 수습되었다. 대좌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연화 대좌로 상대, 중대, 하대로 구성되었으며 하대는 팔각의 받침대와 복련석으로 이루어졌다. 받침대에는 각 면에 측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복련은 복판중엽으로 8엽을 둘렀으며 각 모서리마다 귀꽃을 조각하였다. 그 위에 2단의 굄이 팔각의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 8면에는 각각 감을 얇게 파고 그 안에 8구의 신장상을 조각하였다. 상대는 단판앙련을 2단으로 장식하고 각 연판 안에는 꽃문양을 새겼다. 광배는 주형의 거신광(擧身光) 형태이며 안쪽에 2줄의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다시 구획하였다. 두광 중앙에 연화문을 새겼으나 신광은 아무런 문양을 새기지 않았다. 두광과 신광 안쪽에는 보상당초문으로 장식하고 바깥쪽에는 화염문을 장식하였다. 광배 위쪽에는 화불 1구가 있고 그 아래 좌우에 화불 8구가 서로 마주보도록 배치하였다. 총 9구의 화불은 원형의 신광과 두광을 갖추고 연화대좌에 앉아 있는 모습에서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지만, 손의 형태가 합장인, 선정인, 여원인 등을 하고 있다.

보물 제543호인 불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를 갖추고 있다. 하대석은 팔각의 받침대와 8엽의 복련이 둘러져 있고, 받침대의 각 면 측연화문 내의 향로와 가릉빈가가 조각되어 있다. 각 모서리마다 귀꽃이 장식되어 화려함을 강조하였다. 2단의 굄 위에 있는 중대석은 각 면마다 우주를 새기고 각 면에 8구의 신장상을 양각하였다. 상대석은 연판 안에 꽃문양인 단판앙련을 3중으로 돌려 새겼다. 복련석은 8엽의 복판중엽의 복련이 새겨져 있는데, 꽃잎의 첨단을 뾰족하게 반전시켰을 뿐 귀꽃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 위로 2단의 굄이 중대를 받치고 있다. 중대석은 약간 파손되었다. 8각으로 모서리마다 우주를 새겼다. 그 안에 각기 팔부중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상대는 반구형의 단판앙련을 3단으로 새기고 안쪽에 꽃무늬를 새겼다. 상대는 복련으로 장식하고 중대는 8각의 각 면에 측연화문을 음각하고 그 안에 주악상을 새겼다. 이러한 특징들은 하대 복련석의 귀꽃이 조식되지 않은 점만을 제외하면 석조여래좌상의 대좌와 크기는 물론 세부 표현 수법까지 모두 동일하다.

▲ 삼층석탑


전각 앞의 넓은 공터에 2단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꼭대기에 상륜부를 장식한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석탑(보물 제545호)이다. 지대석을 깔고 그 위에 기단석을 올렸다. 기단석의 면석 모서리와 가운데에 우주와 탱주를 새겼다. 갑석은 여러 장의 돌로 결구하였고, 윗면은 경사가 뚜렷하여 네 귀퉁이는 합각을 이루며, 윗부분은 높고 둥글면서 굄과 낮고 각진 굄을 함께 새겼다. 윗 층 받침돌의 면석은 4장의 널돌로 조립되었는데, 2장의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를 모각하였다. 다른 2장의 면석에는 탱주 1개만 새겼다. 널찍한 1장의 널돌을 올린 덮개돌에는 밑면에 부연(副椽)이 마련되어 있고, 가파른 경사를 이룬 윗면에는 네 귀퉁이의 합각이 뚜렷하면서 둥글고 높은 굄과 함께 각지고 낮은 굄이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각 층의 몸돌 좌우에 우주를 새겼다. 지붕돌의 낙수면 윗면이 평박하면서 합각의 선이 예리한데, 네 귀퉁이의 전각에 반전이 있어 합각의 끝부분도 반전되어 경쾌하게 보인다. 윗면에는 2단의 낮은 굄이 있고, 밑면의 받침은 1층과 2층이 5단이지만 3층만은 4단으로 줄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에는 하나의 돌로 만든 노반(露盤)만 남아 있는데, 윗부분에 부연이 새겨져 있다.

이상과 같이 두 기의 불상과 광배, 대좌, 석탑 등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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