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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승탑에 새겨진 철감선사의 혼 ‘화순 쌍봉사’ 1

  • 기사입력 2018.09.14 13:17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和順 雙峯寺 澈鑒禪師塔碑) 보물 제170호
쌍봉사극락전 (雙峰寺極樂殿) 문화재자료 제66호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중리 사동마을 쌍봉사



용암산과 천봉산, 계당산, 군치산, 금성산이 둘리고 망경봉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쌍봉사가 터를 잡고 있다. 843번 도로를 따라 쌍봉사 입구에서 서원천을 건너려고 하면 ‘사자산 쌍봉사’의 표지석이 사찰을 가리킨다. 토석 담이 서원천 따라 이어지는 가운데 맞배지붕의 일주문이 우람하게 짜인 공포의 구조에 두 개의 기둥은 힘들어 보인다.

▲ 일주문


일주문을 들어서면 복잡한 세상의 번뇌를 물속에 씻어낼 정도로 아름다운 연못이 반긴다. 연못에 둥근 섬이 있으면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한다. 고대 중국의 수학 및 천문학 문헌인 『주비산경(周?算經)』에서, “모난 것은 땅에 속하며, 둥근 것은 하늘에 속하니,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고 선언되어 있다. 그러나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부터는 천원지방을 하늘과 땅의 실제 모양으로 보는 데 반대하는 입장이 더 널리 퍼졌다. 『대대례기(大戴禮記)』에는 “만약 정말로 하늘이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면, 하늘이 땅의 네 모서리를 가리지 못하는” 불합리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증자(曾子)의 언급이 실려 있기도 하다. 그러나 쌍봉사의 연못은 모두 원으로 이루어졌다. 네모나야 할 연못의 형태도 둥근 모양이고 가운데 소나무를 이고 있는 섬도 원형이다. 연못은 하늘의 변화무상함을 빠짐없이 담는다. 소나무를 이고 있는 원형의 섬은 하늘이라기보다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모두 담아낸다. 즉 연못에는 천원과 지방이 바꿔있는 샘이 된다. 연못의 하늘은 물 표면이고 땅의 위는 원형의 섬이 된다.

▲ 연못


쌍봉사의 원형 연못은 동그라미로 이루어졌다. 원불교에서 원은 법, 신, 불 일원상이라 하여 세상의 진리를 상징화한 것이라고 한다. 법은 우주의 진리 또는 부처의 가르침을, 신은 육신, 불은 부처, 즉 깨달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연못을 지나면 또 천왕문을 만나고 문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토석 담이 영역을 정했다. 이곳부터 쌍봉사의 주 영역이 시작된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앞에 그 유명했던 삼층 목탑이 자리하고 있다.

▲ 사천왕문


쌍봉사는 혜철이 통일신라 신문왕 원년(839)에 당나라에서 돌아와 쌍봉사에서 여름을 보냈다는 내용이 곡성 태안사 혜철 승탑에 기록되어 있어 이전부터 쌍봉사가 창건되었음이 짐작이 된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쌍봉사는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에 의해 사세가 커졌다. 철감선사는 통일 신라 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중국 당나라로 불교 공부를 하기 위해 떠났다가 문성왕 9년(847) 범일 국사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물렀으며, 경문왕대에 화순 땅 이곳으로 들어와 절을 중창하고 ‘쌍봉(雙峰)’인 그의 호를 따서 ‘쌍봉사(雙峰寺)’라 이름하였다. 고려 시대로 넘어오면서 최 씨 무신정권 3대 집권자인 최항이 쌍봉사의 주지가 되어 사세가 확장되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의해 사찰은 화재로 소실되어 재건하였으나, 초라한 모습으로 전전하다가 1911년 사찰령의 시행으로 해남 대흥사의 말사로 편입되었고, 해방 후 송광사의 말사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0년 6.25를 겪으면서 다시 대웅전과 극락전만 남기고 나머지 건물은 소실되었다. 1984년 4월 3일 신도의 부주의로 촛불을 잘 못 다루어 전소되었다.

▲ 대웅전


화재 전의 삼층 목탑 대웅전은 상륜이나 찰주가 없어 탑파로 보기에는 어려우나 전체적인 형태가 법주사 팔상전처럼 3층 목탑의 형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한국의 목탑에서 소중한 가치를 가진 문화재였다. 근년 중수 시에 나온 상량문에 의해 조선 경종(景宗) 4년(1724)에 세 번째 중건(重建)한 것임이 드러났다. 대웅전은 평면이 정사각형인 3층 전각으로서 목조탑파 형식을 유지한 희귀한 건축이다. 평면이 정사각형인 3층 전각으로서 제일 위의 3층 지붕은 팔작지붕이나, 1962년에 실시된 해체 복원공사에서, 그 원래의 형태는 사모 지붕이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3층의 정 방향 단칸집으로 목조건물이다. 규모는 1층 한 변이 4m, 2층은 3.3m 3층은 2.6m이며 2층과 3층에서는 탑신 높이가 극도로 줄어들었다. 2, 3층은 2출목(二出目), 초층은 3출목(三出目)이며, 공간포(空間包)는 초층과 2층이 2개씩 3층은 1개를 배치하였다. 내부 초층에는 마루를 깔고 불단(佛壇)을 안치하였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각 층 지붕의 춘설(春舌)들은 모두 그 뒤끝이 이 심주에 연결되어 있다. 지붕은 1층, 2층이 우진각이고 3층이 팔 작인데 길게 뻗은 무거운 처마에 맞추기 위해 포(包)는 각 면에 2개를 첨가한 다포(多包)로 되어 있다. 현재의 3층 목탑은 1986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중건되었으나 보물 지정이 해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극락전


대웅전 뒤편에는 극락전이 자리하고 있다. 자연석을 다듬은 축대를 올리고 낮은 외벌대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에 맞배지붕으로 단아한 다포계 양식이다. 커다란 덤벙주춧돌 위에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참방을 끼워 넣고 평방을 올린 다음 공포를 배치하였다. 공포의 구성은 내외 이출목으로 공간포를 기둥 사이마다 1좌씩 배치했다. 6.25로 대부분 건물이 소실될 때 대웅전과 함께 보전되었으며 쌍봉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우물천장에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창문은 2분합 띠살문이다. 처마는 앞면은 부연을 둔 겹처마이고 뒷면은 홑처마이며 양 측면에 방풍판을 달았다. 극락전은 서방극락 정토의 주제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으로 흔히 무량수전, 극락전, 아미타전 등으로 불리는데 대웅전 대적광전과 함께 3대 불전이다.

철감선사탑 탐방로를 걷다 보면 바람 소리와 댓잎 소리를 벗 삼아 돌계단 길을 따라 오른다. 숲에서 듣는 자연의 소리가 아닌 댓잎과 잎의 만남에 반가운 소리로 답답한 가슴까지 열려준다. 다듬지 않은 돌로 계단을 놓고 그 계단 하나씩 밟고 걷다 보면 차오르는 숨소리도 대나무 잎 소리에 묻혀버린다. 잘 다듬어진 승탑 구역과 탑비 구역이 서로 인접해 있다. 이곳이 철감선사의 행적을 기록했던 탑비와 그의 유골이 안치된 승탑이 자리하고 있다.

▲ 철감선사탑비


철감선사탑비는 현재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고 비 몸은 현재 없는 상태이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 기법으로 보아 당대를 대표하는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비는 옆의 승탑과 함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탑비는 신라 경문왕 8년(868)에 입적한 철감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사찰 주변 마을에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비석을 땅에 묻었다고 한다. 생동감 있게 조각된 귀부는 사각형의 평탄한 돌 위에 오른발은 들고 있어 앞 발바닥이 보이고 왼발은 땅을 짚고 있는 형상이다. 발가락은 3개로 이루어졌으며, 뒷발도 앞으로 가기 위한 모습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꼬리는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일반적인 귀부에 비해 높이가 낮은 편이고 파손된 부분 없이 원래의 모습대로 남아 있다. 머리는 용두를 닮아있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잎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머리 위에는 불쑥 튀어나온 돌기가 한 개 있다. 입가에는 활짝 펼친 지느러미 같은 것이 있으며, 눈은 마름모 모양의 안상 안에 동그랗게 표현되었고 눈썹은 눈보다 약간 올라오게 표현하면서 위쪽으로 눈썹의 털을 표현하였다. 코는 뭉툭하면서 약간 위로 올라 있고 콧구멍이 두 개가 표현되어 있다. 귀는 뒤쪽으로 붙어있으며 귓구멍도 표현되었다. 목은 곡선을 이루며 중앙에 8개의 비늘 모양을 표현하였다. 비교적 얇은 등껍질에는 두 겹으로 된 육각형 거북 등껍질 무늬를 선으로 표현하였다. 거북등 중앙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비대를 만들고 네 면에는 구름무늬를 새겼다. 그 위에 마련된 받침대에는 32장의 복련을, 그 윗면에는 3단의 비석 굄을 새겼다.

▲ 철감선사탑비


이수 부분은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두고 서로 차지하려는 듯한 용의 형상을 가득 채웠다. 앞면에는 3마리의 용을 배치하여 모두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중앙 상단에 있는 용은 여의주를 물고 있으나 좌우의 용은 여의주가 없이 입만 크게 벌리고 있다. 전면 중앙에는 위패를 모시는 홈을 만들고 그 안에 ‘雙峰山故澈鑒禪師碑銘(쌍봉산고철감선사비명)’이라고 세로로 두 줄 새겼다. 비명이 남아 있어 탑비와 승탑의 주인공을 알 수 있고 조성 연대도 철감선사 도윤이 죽은 868년 후로 추정되고 있다. 이수의 뒷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몸을 뒤틀어 마주 보게 표현하였으며, 구름 속을 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수 정상에는 귀꽃이 3개 솟아 있었으나 왼쪽의 것은 훼손되어 없어진 상태로 구멍만 남아 있다. 이수의 아래에는 3단의 받침을 새겼고 위에는 연꽃잎을 둘렀고 다시 연꽃 안쪽에 작은 꽃을 새겼다. 연꽃 위에는 돋을 새김한 줄을 새겼고 바로 위에 구름을 마치 덩굴무늬에 둘린 것처럼 새겼다. 비신의 행방에 대해서는 1786년에 세워진 쌍봉사 사적비에 ‘철감선사의 이름마저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라고 기록된 것과 ‘절의 동서 양쪽에 비석이 있는데 서쪽의 것은 신라 때의 것이고 동쪽의 것은 고려 때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라고 기록되었다. 이 두 비석 중 서쪽의 것이 철감선사의 비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 철감선사탑비 전액


철감선사는 경문왕을 불법에 귀의하게 하였으며, 71세의 나이로 쌍봉사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철감(澈鑒)’이라 내렸다.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으나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 기법이 뛰어나 당대를 대표하는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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