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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연을 맺은 속리산의 ’정부인송‘

  • 기사입력 2019.01.11 10:23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 : 보은 서원리 소나무(천연기념물 제352호)
보은 속리정이품송 (천연기념물 제103호)
소재지 : 충북 보은군 장안면 서원리/속리산면 상판리

소나무는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수목으로 우리나라의 식생을 표징 하는 나무이다. 솔나무, 송목, 적송, 육송 등으로 불리며 송유송, 자송, 청송 등으로 불린다. 또한 소나무는 표징(表徵) 되는 만큼 상징성에 따라 정목(貞木), 출중목(出衆木), 백장목(百長木), 군자목(君子木) 등의 이름도 갖는다. 우리 민족은 소나무문화권에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은 자작나무 문화이고 일본은 조엽수림 문화가 있다.

소나무가 이 땅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약 530만 년 전의 플라이오세에서부터 시작하여 인류의 활동이 활발해진 역사시대에 들어오면서 급격히 늘어났다. 소나무 무리는 양지성 나무로 햇볕을 좋아한다. 숲에서 넓은잎나무와 함께 자라게 되면 경쟁에서 밀려 사라져 버린다.

우리 땅에 소나무가 자라기 시작한 것은 6천 년 전쯤으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에 “신라 애장왕 2년(802) 10월에 날씨가 매우 추워서 소나무와 대나무가 얼어 죽었다”고 최초의 기록이 있으며, 신라의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돌아와 해안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대사(臺社)를 꾸미고 송죽(松竹)을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소나무는 중에 줄기가 붉은빛이 감도는 육송과 해안지방에 많아 자라는 흑갈색의 해송이 있다. 특히 금강산을 중심으로 강원도에 자라는 나무를 강송이라 부르는데, 이 소나무는 곧게 뻗는다는 데서 붙어진 이름이다. 춘양목은 춘양으로 실어온 나무라는 의미로, 삼척이나 봉화, 울진 등지에서 곧게 뻗은 목재를 일단 춘양역에 모았다가 기차로 실어 나른 데서 붙은 이름으로 금강송을 뜻하는 이름이다.

▲ 서원리의 소나무

<사기>에 “송백(松柏)은 백목의 장으로서 황제의 궁전을 수호하는 나무”라 하였고, <자설(字說)>에는 “소나무에는 공의 작위‘를, 잣나무에는 백의 ’장위‘를 주었다”고 한다. <한서(漢書)>에는 “소나무는 유공과 같고 잣나무는 유백(猶伯)과 같다”고 하였다. 소나무는 장수의 상징이라 하였다. 해, 물, 돌, 산, 구름, 불로초, 거북, 학, 사슴 등과 같이 소나무는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를 상징하였다. 소나무는 절개, 지조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장엄한 모습의 소나무는 늘 푸른 모습을 간직하고 잎 넓은 나무처럼 작은 바람에도 잎이 흔들리지 않고 바람을 지나게 한다. 높은 산의 바위틈에서도 한 한 모금 흔하게 마실 수 없는 곳에서도 가지를 뻗고 자신의 의지를 자랑스럽게 표현한다. 한번 베어버리면 다시 움을 내지 않는 것도 구차하게 살지 않는다는 지조를 보여준다. 초목의 군자, 군자의 절개, 송죽 같은 절개, 송백의 절개 등은 한결같은 절개를 강조한다. 소나무는 깨끗하고 귀한 나무로서 하늘의 신들이 땅으로 내려올 때는 높이 자란 소나무 줄기를 택한다고 믿어왔다. <산림경제>의 기록에 집 주변에 송죽을 심으면 생기가 돌고 속기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꿈에 소나무를 보면 벼슬할 징조이고, 솔이 무성함을 보면 집안이 번창하며, 비가 온 후에 솔이 나면 정승 벼슬에 오르고, 송죽의 그림을 그리면 만사가 형통하다고 하였다. 영월의 장릉 주위에 있는 소나무들은 모두 장릉을 향해 굽어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이는 억울한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에 대한 충절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또한 소나무 잎은 부부애의 상징이라 한다. 두 개의 잎은 잎자루 안에 나서 아랫부분이 서로 접촉하여 그 사이에 ‘사이눈‘이라는 작은 생명체를 지니고 있고, 또 그 잎이 늙어서 떨어질 때도 서로 헤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어서 최후를 마감함으로써 완전무결한 백년해로 모습을 보이는 뜻에서 부부애를 상징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나무를 ’음양수‘라하고 “부부는 솔잎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이 생겨났다.

보은군에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부부의 연을 맺고 ’정부인송‘이라 불리고 있다. 먼저 속리산 법주사로 향하는 길목에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정이품 소나무가 외줄기로 곧게 자라서 남성적이라면, 약 5km 떨어진 서원리에 자라고 있는 또 한 그루의 소나무가 우산 모양의 수형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여성적이라 하여 두 나무를 ‘정부인송’이라 불렀다.

▲ 서원리의 소나무

속리산 법주사로 가기 전에 먼저 장안면 서원리 49-4에 터를 잡고 자라고 있는 ‘보은 서원리 소나무(천연기념물 제352호)’를 보아야 한다. 서원리 소나무는 속리산 남쪽의 서원리와 삼가천을 옆에 끼고 뻗은 도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추정 나이를 약 600살로 보고 있으며, 수고(樹高)는 15.2m, 뿌리 근처의 둘레는 5.0m, 줄기는 84cm 높이에서 2개로 갈라졌으며, 전체적으로 넓게 펼쳐진 우산 모양을 하고 있다.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의 끝은 쳐져 있는 가지를 위로 치켜 올리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전체적인 모습이 바람에 나부끼는 치마처럼 보인다.

▲ 서원리의 소나무

소나무 주변에는 산이 둘려 있으며 그 가운데에 소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주변의 산이 소나무를 보호하는 격이 된다. 비바람에도 그렇게 흔들림 없이 자랄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서 무성하게 모양을 갖추었다. 한 나무가 두 개의 줄기를 내었고, 그 줄기에서 반반씩 가지를 뻗어 치마를 두른 듯한 수형을 갖추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 정이품 소나무

이와는 다른 모습의 정이품 소나무는 600여 년의 나이에 높이가 14.5m가 되는 키 큰 나무이지만 왜소해 보이는 모습이 어딘가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모두 떠나간 자리에 홀로 서 있는 정이품 당상관의 모습이라 생각하면 될 만한 것 같다.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아 가지가 부러지고 수형마저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정이품 소나무이다. 전국 곳곳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이 있지만, 벼슬을 가진 소나무는 이 소나무뿐이다. 처음부터 길이 있는 곳에 아름다운 수형을 가진 소나무였으나 지금도 전체적인 수형은 우산을 펼쳐놓은 정형화된 모습이지만, 곳곳에 가지가 잘려나가 있는 상태는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없는 처절한 상태이다.

이 소나무가 벼슬을 갖게 된 일화는 조선 세조와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1464년(세조 10)에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가던 연(가마)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가지가 처져있어 “연(輦)이 걸린다.”고 말하자 이 소나무가 가지를 위로 들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연걸이소나무’라 하였는데, 그 뒤 세조가 이 소나무에 정이품의 벼슬을 하사하여 ‘정이품 소나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 정이품 소나무

이 소나무는 오랜 세월 사는 동안 크고 작은 재해를 입었는데, 특히 1980년대 초 솔잎혹파리의 피해 때문에 큰 비용을 투자하여 대규모 방충망을 치기도 하였다. 이때 까지만 하여도 조선의 선비답게 올곧게 자라 삿갓 또는 우산 모양의 수형을 자랑했는데, 1993년 강풍으로 인해 그만 서쪽 큰 가지가 부러지면서 아름다웠던 모습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정이품송은 늘 소나무로서의 그 위풍당당함을 잃지 않으려는 기상이 언제나 남아 있으며, 앞으로 강풍으로 인해 부러진 가지만큼이나 그 수형을 다시 찾는 날이 왔으면 한다.

서원리소나무와 정이품소나무가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옛 선비들은 정이품소나무 앞을 지날 때면 아름다운 풍치에 시 한 수를 읊을 수 있었을 것이고, 마을 사람들은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나무는 민속과 문학을 탄생시키는 원천이 되었다. 시가에는 소나무가 수없이 소재로 등장한다. 소나무가 빚어내는 아름다운 정경과 변하지 않는 굳센 절개를 읊은 것이 주조를 이룬다. 옛사람들은 소나무를 다섯 가지 미(美)라 하여 빛(常綠), 모양(麗姿), 달그림자(月影), 소리(風聲), 향기(松香)를 높이 찬양하여 시가의 제재로 삼았다. 한 예로, 사명대사는 <청송사(靑松辭)>에서 다음과 같이 소나무를 예찬하였다.
“松兮育兮/草本之君子/霜雪兮不腐/雨露兮不榮/不腐不榮兮/在冬夏靑靑/育兮松兮/月到兮篩金/風來兮嗚琴 소나무 아! 푸르구나/초목의 군자로다/눈 서리눈서리 이겨내어/비 오고 이슬 내려도/웃음을 숨긴다/슬프나 즐거우나 변함이 없구나!/겨울 여름이 항상 푸르구나/소나무에 달이 오르면 금모래를 체질하고/바람 불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추사 김정희가 사제 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두 번씩이나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제자인 역관 이상적에게 1844년(현종 10)에 답례로 수묵으로 그려준 새한도는 이상적인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표현하였다.
이이(李珥)는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송·죽·매를 꼽았고, 윤선도(尹善道)는 그의 시조 오우가(五友歌)에서 벗으로 쳤다. 성삼문(成三問)이 죽임을 당할 때 지은 '독야청청(獨也鯖靑)하리라'라고 한 시는 충절의 노래이다.

▲ 정이품 소나무

소나무의 목재는 오랜 세월 동안 다방면으로 이용되어 왔다. 기둥·서까래·대들보 등의 건축재로, 관재(棺材)로, 조선용으로 쓰였다. 특히 경상북도 북부와 강원도의 태백산맥에서 나는 중곰솔은 재질이 우수하여 창틀·책장·도마·다듬이·병풍틀·말·되·벼룻집 등의 가구재로, 소반·주걱·목기·제상·떡판 등의 생활용품으로, 지게·쟁기·풍구·물레통·사다리 등의 농기구재 등으로 이용되었다. 오늘날에도 완구·조각재·가구·포장용 상자·펄프·합판 등 용도가 다양하다. 연료로도 주종을 이루었다.

온돌에 소나무장작을 때었고 취사용으로 솔갈비가 가장 뛰어났으며, 조리에는 송탄(松炭)을 사용하였다. 《경국대전》에는 각 지방에서 장정들을 징집해서 소나무로 숯을 구워 바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또 향탄산(香炭山)을 지정하여 주민으로 하여금 숯을 굽게 하여 상납시켰다.

소나무의 줄기에 상처를 내어 채집한 송진은 용제·의약품·화학약품의 원료로 이용되었다. 소나무의 속껍질을 백피(白皮)라 하여 생식하거나 송기떡을 만들어 먹거나 솔잎을 갈아 죽을 만들어 먹는 등 구황식품으로 이용하였다.
한방에서는 송진을 송향(松香)이라 하며 거풍·진통·배농(排膿)·발독(拔毒) 등에 효능이 있어 풍습(風濕)·악창(惡瘡)·백두(白兜) 등의 치료에 처방한다. 소나무를 벌채한 후 3∼4년이 지난 소나무 뿌리에 외생균(外生菌)이 공생한 균괴(菌塊)를 복령(茯笭)이라 하여 귀한 약재로 쓰인다.

소나무로 만든 술은 거풍·소종(消腫)·이뇨 등의 효력이 있으며, 송엽주(松葉酒)·송실주·송운주·송하주·송절주(松節酒) 등이 있다. 송엽주와 송실주는 늦은 봄에서 초여름에 풋 솔잎이나 풋 솔방울을 따서 담은 술이다. 송하주는 동짓날 밤에 솔뿌리를 넣고 빚은 술을 항아리에 담고 봉해서 소나무 밑을 파고 묻었다가 이듬해 가을에 먹는 술이다. 송절주는 소나무 옹이를 넣고 빚은 술이다.

소나무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정이품소나무나 서원리소나무는 사람이 태어나면 그 순간부터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가는 그 순간까지 내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해 왔다. 우뚝 서서 푸름을 잊지 않는 모습에 우리의 민속을 낳았고 수많은 문인을 불러들였다. 지금도 두 소나무는 정부인송으로 늘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서원리소나무에게 마을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정부인송으로 오래 남기기 위해 2002년과 2003년에 정이품송의 꽃가루를 가루받이하여 후계목을 길러내는 사업을 시도하였다.
속리 서원리 소나무는 민속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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