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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조국 평화통일

  • 기사입력 2019.06.01 06:13
  • 기자명 윤영전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
▲  윤영전 (사)평화통일시민연대 이사장

세월은 참으로 빠르게도 간다. 고희(古稀)를 10년 전에 보내고 희수(喜壽)를 지난해에 보냈다. 명년이면 팔순의 나이인데, 가는 세월 어찌 붙잡을 수 있을까? 지난 세월보다 짧은 여생을, 우리소원인 ‘분단조국 평화통일’을 기필코 이뤄내야 하지 않을까!

지나온 삶을 어찌 살아왔느냐고 묻는다면, 최선을 다했지만 후회도 많았던 삶이었다. 내 살아온 세월이 격동의 시대였기에 희로애락의 삶이었다. 기쁘고 즐거움 보다 질곡의 순간들이 더 많았던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하기만 하다.

한때는 혼돈의 시대에 잘못 태어났다고 치부해 버리기도 하고, 어느 때는 안이하게 무료한 시간으로 허송세월 보내기도 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노력도 부족했기에 한없이 자괴감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내 탓이었기에 한없이 후회스러웠다.

허나 어느 때는 궤변도 더러 늘어놓았다. 시대와 조상을 잘못 만나서, 아니 운이 없어서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허나 진솔하게 생각해보면 게으름을 피우고 노력도 않으면서 남 탓이라 한다면 이는 궤변일 터이다. 어느 때 나에게도 기회가 있었고 도전하여 결실을 거두는 일도 있었기에 후회와 보람도 있었다.

해방공간과 6.25 전쟁 전후에서 철부지였던 어린 나는, 맏형의 억울한 죽음과 혼돈을 목도하게 되었다. 그때 각인되었던 아픔의 세월이 성년이 되어서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스물두 살에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한 집안기둥인 맏형이 65년 만에야, 진상이 규명되고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실로 오랜 세월 인고의 아픔이었다.

반백년 전, 나 또한 가면 죽는다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용기는 어디서 났는지! 그때 파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도전이었다. 참전 13개월 동안 전선 없는 전쟁터에서 생과 사 갈림길의 순간이었다. 삶의 귀함을 인식하고 분단국의 평화와 통일을 더욱 갈망하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또한 부역자 신원 조회를 이겨냈고, 둘째형이 인민의용군에서 또한 국군으로 참전한 전투에 부상을 입고 상이제대를 했다. 그 후 형의 세 차례의 선거로 집안이 기울어져 진학의 꿈도 접어야 했었다. 그러나 “배워야 하고 아는 게 힘이다”에 주경야독으로 학업에 임하였다. 그때 모든 것을 포기할 뻔도 했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용기도 잃지 않았던 순간이, 내 인생에 기로이기도 했다.

또한 집안의 슬픔은 열일곱 살에 청상과부가 되신 양할머니가 우리 8남매 손 자녀를 조산원처럼 척척 받아내고 양육하신 것이다. 이런 연유로 양할머니가 열녀로, 부모님이 효자효부로, 나는 3남이면서 30년 부모님을 모셔 효열 3대가로 이어 왔었다. 8남매 중에서 내가 기준과 중심을 잡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 가문은 어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풍비박산 집안이 되었을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런 사실들이 자화자찬처럼 느껴져 송구하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항상 자성하고 자책하면서 다짐하곤 했다. 과연 남은 세월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하나, 늘 생각했다. 지난 삶을 잘 이어가고 과오를 뉘우치며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삶이었다고 생각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부족한 글쓰기에 다가갔다. 초등학교에서 글짓기에 대한 흥미가 성년에 더욱 살아나면서 만학의 꿈을 갖게 되었다. 가방끈이 짧다는 자괴감도 있지만 열심히 노력해 배우면 따라갈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부족하기만 했다. 욕심이 과했는지 여러 권의 책을 냈지만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글을 쓰는데 문학에서 소설과 수필을 쓰고 칼럼도 쓰고, 또한 서예 붓글씨도 어려서부터 쓰고 있다. 여러 분야 작품을 선보이지만 역시 부족하기만 하다. 많은 퇴고와 연마를 해야 하는데 시간 부족으로 미진한 작품을 내고 만다. 퇴고를 잘해야 했는데도 미진한 작품이 나오면 후회가 뒤따를 뿐이다.

항상 내 스스로 게으름과 서두르는 잘못을 저지르는 면이 있다. 글쓰기에 있어 나에게 다가온 과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한 조선반도 분단의 아픔을 어찌 치유하느냐? 는 무거운 주제였다.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원한다면 말로나 노래만 하지 말고,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선봉에 앞장서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나는 실천을 위해 평화통일에 진력하는 여러 단체의 일원이 되고, 간부가 되고 단체에 책임을 맡아야 했다. 분단 현실에는 일제에 36년을 지배당하고 해방이 아닌 분단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외세를 막지 못하고 이루어졌다. 이런 엄연한 현실을 인식한다면 우리 8천만 동포들이 외면만 할 수는 없을 터이다.

나라 잃은 설움에 32세 안중근 의사와 23세 윤봉길 의사가 계신다. 처자식을 두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정신을 우리는 본받아야 한다. 윤봉길 의사는 내 윤문중의 형님항렬이다. 8.15 광복은 바로 분단으로 이어져 75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흘러만 갔다. 지구촌에서 가장 오랜 분단국가로 언제 평화통일의 그날이 올까? 필연코 우리가 이뤄내야 한다.

우리의 조국이 평화와 통일을 이루려면 8천만 동포들이 분발해야 한다. 나는 지난 통일교육위원으로, 평화연대 등 재야단체 임원으로, 통준사 공동대표도 맡고 있지만 항상 부족하기만 하다. 비록 통일을 원하지 않는 동포나 그리고 주변 외세가 있어도 우리는 이를 극복해 내야만 하지 않을까.

오랜 분단에 조국의 통일을 위해 희생되신 안중근, 윤봉길 의사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오래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록 두 분 의사(義士)처럼 젊지 않는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이제 내 생애를 ‘마무리 잘하는 삶’은 정의 평화 통일의 길 일 뿐이다. 오랜 분단조국의 평화통일 보다 더 소중한 꿈이 있을까.

나는 생각한다. 그동안 좌우명으로 삼았던 최선을 다한 삶을 살면서, 나와 맺은 아름다운 인연에 감사한다. 또한 “아름다운 마무리를 잘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우리 8천만 동포의 꿈이요 소원인, 한(조선)반도에 평화통일을 필연코 이뤄내야 한다. 그래서 평화통일 세상에서 살아가는 꿈을 자주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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