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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초 홍명희 임꺽정

  • 기사입력 2019.10.09 20:37
  • 기자명 윤영전 (사)평화통일시민연대 이사장
▲윤영전(사)평화통일시민연대 이사장

산자수려하고 공기 좋은 괴산(槐山)에서는 가을이면 ‘홍명희(洪命熹) 문학제’가 열린다. 마치 노란비단자락을 깔아놓은 듯 황금들판이 눈부시다. 마을 곳곳에는 빨간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가을정취가 더욱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괴산은 <임꺽정(林巨正)> 저자 벽초(碧初) 홍명희 작가의 고향이다. 벽초 탄생을 기념하는 문학행사는 인산리 생가마을에서 열렸다. 이백 오십년도 더된 고가는 그동안 관리소홀로 헐릴 뻔했는데 그곳 유지들이 뜻을 모아 예전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전통한옥이 한 백 칸도 넘는 생가에는 한때 수십 명의 식솔들을 거느릴 정도로 지난날의 사대부가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풍산 홍씨인 벽초는 증조부가 이조판서를 지낸 홍우길(祐吉)이고 조부는 정2품 중추원 참의를 지낸 홍승목(承穆)이었다.

벽초 그는 1888년 7월 3일 금산군수를 지낸 부친 홍범식(範植)과 모친 은진 송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고 신학문을 접한 뒤, 일본 도쿄에 유학하여 서양문학과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탐닉한 수재였다고 한다.

당시 절친하게 지낸 춘원, 육당과 함께 조선의 삼재(三才)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삼재들의 모습이 각각 떠오름에도, 춘원과 육당의 친일행적에 대하여 아쉬움이 크기만 했었다. 그러나 벽초 만은 분단 조국의 통일의 염원을 저버리지 않았다.

▲ 벽초 홍명희 문학비   

벽초는 1910년 1월에 유학해 졸업을 앞두고 귀국했다. 그해 8월 29일 부친이 경술국치에 항거 자결로 순국하자, 그 충격으로 민족문제에 눈뜨기 시작했다. “나라를 찾아라! 친일하지 말라!”는 아버지 유언을 그는 평생 동안 좌우명으로 삼았고, 가훈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19년 3월 괴산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도 치렀다. 1924년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과 시대일보사장에 이어 1926년 민족의 교육기관인 오산학교 교장을 지냈다. 이어서 항일단체인 신간회를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다가 카프맹원에 연류 되어 1년 6개월 수형생활을 해야만 했다.

해방이후 조선문학가 동맹위원장으로 추대되고 1948년 백범과 평양남북연석회의에 참석 후 남쪽의 정세가 긴박해 북에 잔류했다. 이어 북한의 초대 내각부수상과 IOC위원 올림픽위원장 인민회의 부위원장과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을 지냈다. 1986년 3월 5일 통일조국을 보지 못하고 81세에 운명하였다. 그는 평양근교 애국열사릉에 잠들었다고 한다.

그는 식민지시대에서 일제에 타협하지 않는 애국지사였다. 만해가 독립운동가요 민족시인이듯, 벽초 또한 해방운동지도자요 남북근대문학사상 최고의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필생의 역작, 대하소설인 ‘임꺽정’도 남북 동포들이 애독하는 소설로 영원히 남아 있다. 또한 작품으로 ‘학창산화’(學窓散話)가 1926년 ‘조선도서사’에서 발행되기도 했었다.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양주 백정의 아들인 임꺽정이 의적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고, 60년대 말에 ‘임꺽정’이란 영화를 관람하면서 임꺽정의 정의로운 행동에 크게 감동했었다. 나도 그와 같은 의로운 사람이 되어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설 <임꺽정>이 세상에 나온 뒤 금서와 저작권 문제로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사계절 출판사에서 북의 소설 <황진이>를 쓴 벽초의 손자인 홍석중 작가와 저작권계약을 맺고 벽초 탄생기념으로 임꺽정 소설 전권을 출판하게 되었다. 이는 남북문학작품교류에 큰 장을 열었고 남북의 독자들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임꺽정 행사는 벽초의 생가가 있는 인산리에서 선산이 있는 제월리로 이사를 했다. 그곳은 괴강이 유유히 흘러 산수화 같은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제월광장에는 벽초의 문학비가 세워져 있었고 비 앞의 통일노둣돌에다 많은 문인들의 친필이 새기어있었다. 나도 ‘한반도 평화통일 기원’을 노둣돌 한 장에 손수 써 놓았다.

금서였던 북쪽 작가의 글이 일부 해제되면서 홍명희 문학비가 세워졌다. 그런데 지역 보수단체들이 이념과 사상을 문제 삼아 강제 철거했다가 4년 후에야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탈냉전 시대가 끝난 지 오래지만 문학에도 여전히 이데올로기 갈등이 일고 있는 현실에, 마음이 아팠다. 더구나 벽초의 부친 홍범식은 경술국치에 목숨까지 바쳐 순국을 했는데도, 조국분단의 아픔에 아랑곳하지 않아 안타깝기만 하다.

광장에는 임꺽정 소설에 등장한 인물의 모습이 담긴 걸게 만장이 펄럭이고 풍물놀이패가 신명나게 판을 벌였다. 마치 임꺽정 소설에 나오는 서민들의 큰잔치처럼, 참석한 문인들도 막걸리를 나무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벽초의 임꺽정을 그리움에서 어우러진 두레의 판이었다.

<임꺽정>은 벽초의 탁월한 사실주의적 표현으로 남북의 역사소설에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다. 비록 대하장편 열권이지만 봉단편, 양반편, 의형제편, 화적편 등 여섯 분류의 편들이 각각의 장편소설이다. 그는 많은 분야의 독서와 조선조실록을 탐독했기에 임꺽정 시대의 실상을 잘 묘사한 최고의 역작이었다.

소설 <임꺽정>이 미국 마가릿 미첼 작가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단 한편의 불변의 명작이라는 것 또한 대단했다. 진정 벽초의 소설 <임꺽정>은 분단조국에서 오직 통일만을 꿈꾸고 실현하려는 의지의 민족작가가 쓴 소설임을 강조하고 싶은 대목이었다.

이날 벽초의 문학을 평론한 강 교수와 자리를 함께하면서, 내 외가가 나주풍산 홍씨라 했더니 그는 홍명희 선생의 조부가 나의 외가인 전남 나주 풍산리에서 이곳 괴산으로 양자를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벽초 작가는 내 외가의 형님 되는 희(熹)자 항렬이었다. 나는 그의 문학비 앞에 더욱 다가가서 묵상을 올렸다.

이 땅에 분단만 아니었다면 벽초는 물론 남북의 문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교류하였다면 보다 한반도 문단이 발전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노둣돌에 새긴 글처럼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이 오고 마는 그날만을 더욱 기원하기로 다짐하였다.

나는 벽초 작가의 고향에서 그동안 써온 소설과 수필을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단 한편의 작품이라도 당신처럼 격조 있는 작품으로 사랑받는 글을 써야 한다고 다짐했다. ‘임꺽정’의 정의로움과 앞으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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