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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으로 남긴 고향의 억새풀 ‘건원릉(建元陵)’

  • 기사입력 2019.12.17 15:15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 건원릉 전경    

 

문화재 : 동구릉 건원릉(사적 제193호)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구리시 인창동에는 아홉 기의 왕릉을 가진 신의 정원 가운데 최고의 신전이 있는 곳이다. 왕이 죽어 땅에 묻힌 묘인데 일반적인 묘에 비해 다양한 격식을 갖추어 만든 왕릉이다. 당대 최고의 풍수지리가와 조경가와 예술가가 만나 꾸민 왕가의 무덤이 지금은 관광지로 유치원생을 시작으로 가족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500년이 넘도록 그린벨트로 묶여 있는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 왕릉, 그중에서 동구릉이 가장 장대하다. 1408년 태조가 잠들었고 마지막으로 1890년 익종(문조익황제)의 수릉이 이전해 9릉 17위가 영면을 취하고 있다.

 

 

정문에서 들어 직선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홍살문을 만난다. 각각의 능에 홍살문이 있지만, 능으로 가는 길목의 홍살문은 이곳부터 왕릉의 영역임을 알린다. 2개의 기둥에 지붕이 없이 19개의 살만 박혀있고 가운데는 홍살 2개가 3 태극을 지나면서 꼬여서 위에는 3개가 되어있다. 붉은색은 신성한 곳을 알리는 의미도 있지만, 붉은색은 악귀를 내 쫒는다는 의미도 있다. 홍살문은 홍전문이라 하는데, 당시 백성들이 화살 ‘전(箭)’자를 ‘살’로 발음하여 홍살문으로 부르게 되었다. 홍살은 9개, 11개, 13개가 있는데 이 중에 9개의 살이 가장 많은데 이것은 9가 완성된 수라 한다. 3 태극 문양은 하늘, 땅, 사람을 의미한다.

 

 

홍살문을 지나면 우측에 왕릉을 관리하는 재실이 있다. 당시 재실에는 종 9품 참봉과 함께 다수의 인원을 상주하였다. 제실을 지나면 9 릉 중에 동쪽에 위치한 조선 추존 문조와 신정황후의 수릉(綏陵)이 자리하고 있다. 잘 조성된 능에는 잔디가 잘 자라고, 멀리서 본 능상의 봉분에도 잔디가 자라고 있다. 수릉을 지나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조선 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목릉(穆陵)은 다른 능에 비해 넓은 터에 잔디로 조성되었다.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오면 금천교를 지나 홍살문에 이른다. 다른 릉에 비해 무엇인가 다르게 보인다. 이 릉이 조선 1대 태조의 건원릉이다.

 

▲ 건원릉 참도와 정자각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408년 5월 24일 향년 7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조선 최초의 왕을 영면하기 위한 왕릉을 조성하는 국사인 만큼 태종은 지관들과 풍수지리에 능통한 대신들로 하여금 한양도성으로부터 100리 이내의 거리, 주변 능과의 거리, 방위, 도로와의 관계, 주변 산세 등을 고려하여 명당을 찾도록 하였다. 왕릉의 입지는 왕릉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자연의 지세를 존중하는 자연 조화적인 조영 방법을 따랐어야 했다. 도성에서 100리 이내는 왕이 왕릉으로 하루에 행차할 수 있는 거리인 100리를 잡아 왕이 궁을 떠나 참배의 행렬이 어렵지 않게 닿을 수 있는 곳을 기준으로 하였다. 택지로서 갖추어야 할 공통 조건은 먼저 배산임수 조건으로 왕릉 뒤쪽에 있는 산은 바람을 감추는 장풍 조건을 갖추어야 하고, 임수에 해당되는 왕릉 앞쪽의 물줄기는 생동하는 기운의 방위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금기시했다. 지형은 야지도 산지도 아닌 비신비야 양식을 택하게 된 것은 흙은 생기의 몸이라는 풍수 원리에 따라 생기 저장탱크 격인 흙더미 위에 자리하려는 의도였다.

 

 

장례를 총괄하는 국장도감,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빈천을 설치하고 염습과 복식을 준비하는 반전도감, 무덤을 조성하는 산릉도감이 설치되어 국장을 분담하게 하여 진행된다. 도감을 설치하고 3~5개월에 이르는 동안 명당자리가 유교적 이념상의 위계질서가 반영되도록 능역을 조성하였다. 봉분이 있는 능침 공간, 정자각 등 제사를 지내기 위한 시설물이 위치해 있는 제향 공간, 왕릉의 관리와 제례를 준비하여 진입공간으로 조성되었다.

 

 

태종은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명당자리를 찾던 중 검교 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 김인귀로부터 양주 검암(현 구리시 검암산 자락)에 좋은 자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하륜이 천거하였고, 태종은 박자청으로 하여금 이곳에 산릉을 조성하였다. 1408년 9월 9일 영구를 안장한 이루 건원릉이란 능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건원릉의 시작은 진입공간(세속 공간)에서 시작된다. 진입공간을 지나면 장대석으로 짜인 금천교를 지나야 한다. 금천교는 신성 공간과 세속 공간의 영역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금천교에서 홍살문에 이르는 구간 좌우에는 소나무가 허리를 굽혔다. 바로 자랐어야 할 소나무는 마치 읍이라도 하듯한 모습이다. 금천교는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는 가리이기도 하다. 이 다리 밖에는 사람의 공간이고 다리 안쪽에는 혼의 공간이다. 공간과 공간을 구분 지어주는 금천교를 넘어서면서 혼의 공간에는 유교적 이념상의 위계질서가 반영된다. 겸손해지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 이 공간에 들어서면 완성의 수를 일컫는 9개의 살창으로 이루어진 홍살문에 이르며 정자각을 향해 곧게 두 개의 길에 박석이 깔려 있다. 약간 높게 놓인 길은 향로(香路)라고 하는데. 제향 시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다. 약간 낮게 있는 동쪽의 길은 어로(御路)이며 제향을 드리러 온 왕이 걸이 길이다. 참도가 시작되는 동쪽에는 네모난 판위가 있다. 이곳은 왕이 능에 도착하였음을 고하는 알릉례와 능을 떠날 때 사릉례를 올리는 배위이다. 이 배위에는 왕이 사배를 하는 것으로 제례는 시작된다.

 

참도는 정자각 앞에서 동쪽을 꺾기고 다시 바르게 갔다가 정자각으로 오르는 계단 방향으로 놓였다. 정자각은 건물 모양이 ‘丁’ 자처럼 생겼다고 허여 부르는 이름이다. 실제로 정자각은 ‘一’ 자 모양의 정전과 ‘丨’ 자 모양의 배 위정이 결합하여 하나의 건물이 되었다. 참도 좌우에는 능을 지키고 제수를 준비하는 수복방과 수라간이 자리하고 정자각 앞에는 소전대가 자리하고 북동쪽에는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비각은 다른 능의 비각과는 달리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정면 좌우 1칸씩은 방화벽을 쌓고 가운데 2칸에는 문을 달았다. 비각 내 우측에는 신도비를 두었고 좌측에는 표석이다. 신도비는 조선왕조 초기 형식의 신도비로 왕의 일생과 치적, 그리고 공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태종에 의해 제거된 사람들이 공신으로 올라가 있는 기록을 볼 수 있다. 표석은 고종대에 세워진 것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국임을 내세웠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자신의 위로 5대까지 황제로 추존하였다. 이때 이수와 함께 하단에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능침 공간의 핵심은 봉분이다. 곡장을 두르고 그 둘레에 소나무를 심어 봉분을 강조하였다. 조선의 초대 왕릉이었던 만큼 관심을 가졌다. 기본 양식은 고려의 왕릉인 공민왕의 현정릉 양식을 따랐고 석물 조형은 남송 말기의 형식을 도입하였다. 세부적으로는 석물의 배치와 장명등의 조형이 약간의 변화를 주었고, 봉분 주위에 곡장을 두는 양식은 조선시대에 추가되었다. 또한 석호와 석양의 배치, 장명등, 난간석주도 조선시대에 와서 새로 변하였다. 건원릉의 원찰로 개경사를 지어 조계종에 소속시켰다는 기록이 있지만, 오늘날에는 절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특이한 것은 건원릉의 봉분에는 잔디가 덮여있지 않고 억새의 은빛 꽃이 햇볕에 나부끼고 있다. 수능과 목능을 둘러보아도 모두 잔디가 덮여 있는데 건원릉만이 벌초를 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태조는 말년에 태종에게 조상들이 묵혀 있는 고향인 함경도 영흥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태종은 고향에 묻는다면, 제례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고, 유언을 거스를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함흥에서 가져온 흙과 억새를 덮는데 그 답을 찾았다고 전한다. 그때 봉분에 심은 억새가 지금도 가을이면 은빛 꽃을 휘날리며 누군가 부르고 있는 듯하다. 건원릉 억새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있다. 억새와 갈대를 구분을 못하고 갈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갈대와 억새는 생육 환경이 다르다. 갈대는 풍부한 물이 있어야 하지만 억새는 물과는 조금 거리를 둔다. 건조한 땅에서도 자랄 수 있다. 다만, 물억새는 습기가 많은 곳에서도 자란다. 봉분에 자라고 있는 식물은 억새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성계가 함경도 함흥의 억새밭에서 싸움에 이긴 것을 기리기 위해 자신이 죽으면 무덤에다 억새를 입혀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라는 것과 이성계의 스승이었던 무학대사가 일찍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왜적들로부터 태조의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억새를 심게 되었다는 일화도 전해오고 있다. 이 억새는 당시 함흥에서부터 한양까지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릴레이식으로 날랐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 건원릉 무인상 

 

 

봉분에는 억새만 자라지 않는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지만, 주변의 식물의 씨앗들이 날아와 억새와 함께 자란다. 개솔새와 새, 억새가 각각 1/3씩 서로 줄기를 비벼대며 자라고 있다. 가끔은 박주가리, 가는잎그늘사초, 댕댕이덩굴 등 바람에 의해 씨앗이 날아오거나 새들에 의해 씨앗이 터를 잡고 함께 자라고 있다.

 

 

다른 왕릉은 모두 7~8월 잔디가 무성할 때 2, 3차례 해주지만, 건원릉만은 해마다 모든 식물이 겨울을 지나고 봄이 되면 파란 새싹이 돋아나 자라기 시작하는 시기인 한식에 벌초를 한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몇 년이고 벌초를 하지 않고 묵어 있는 왕릉으로 오해할 수 있다.

 

 

건원릉(建元陵) 서쪽으로 조선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조선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元陵), 조선 제24대 헌종과 원비 효현황후, 계비 효정황후의 경릉(景陵), 조선 제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의 혜릉(惠陵), 조선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崇陵)의 조선조 시대 아홉 기의 릉(陵) 17위가 모셔져 있는 역사적인 조선왕릉 유적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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