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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낙랑군을 철수하라

  • 기사입력 2020.01.07 16:10
  • 기자명 이찬구<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 사무총장>

우리 역사에서는 한사군(漢四郡)의 낙랑군(樂浪郡)과 최씨 낙랑국(樂浪國)을 혼동함으로써 고대사에 큰 혼란이 있다. 따라서 그 실체를 바로잡는 것은 고대사 연구에서 매우 시급한 과제 중의 하나다.

광복 후 국사학계를 장악한 조선사편수회 출신 이병도는  『한국사대관』에서 최리의 낙랑국에 대한 관심을 차단하고, 평양 부근에 낙랑군이 있었다면서 우리 역사의 시작을 한나라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 시기 북한의 리지린은 『고조선연구』에서 “두 개의 낙랑은 신채호 선생이 이미 명백하게 해명한 바와 같이 서로 다른 지역”이라고 단언하고, 한반도 안에 있었던 낙랑은 최리의 낙랑국이라고 주장하였다. 1985년 윤내현은 「한사군의 낙랑군과 평양의 낙랑」에서 현재의 평양에는 최리(최씨)의 낙랑국이 있었고, 한사군의 낙랑군은 요서(遼西) 지역 난하 하류 동쪽에 있었다는 것을 구체적인 중국 사료를 근거로 명확히 밝혔다.

그러나 강단사학계는 이런 바른 학설은 무시한다. 심지어, 최근 언론으로부터 ‘무서운 아이들’이란 애칭까지 들으며 사학계의 총애를 받고 있는 젊은 사학도 중 한명은 “낙랑군은 4세기 전반 대동강 유역에서 요서 지역으로 교치되었고, 5세기 전반 요서지역에서 난하 유역으로 교치되었다. 그러므로 후대의 문헌에서 낙랑군 또는 그와 관련된 지명이 난하 유역에 보인다고 해서 이를 한사군과 직접 연관해보기는 어렵다”(이정빈)는 교치설을 주장하지만, 근거가 되는 1차 사료(原典)을 제시하지 못한다.

『한서』에는 가연지(賈捐之)가 ‘(서기전 100년 경)유철(한무제)이 수도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해남을 정벌하고…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현도 낙랑을 군으로 삼았다(東過碣石 以玄兎樂浪爲郡)’는 기록이 있다. 한반도에는 갈석산이 없으니 한사군이 평양에 있을 수 없다. 또 『후한서』에는 최인을 “장잠현의 현령으로 내보냈다”면서 그 주석에 “장잠현은 낙랑군 소속인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長岑縣, 屬樂浪郡, 其地在遼東)고 말하고 있다.

이병도도 실증사학을 강조하면서 ‘역사 기록이 가장 큰 실증자료’라고 했다. 그런데도 1차 사료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는 낙랑군 재 평양설은 당장 철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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