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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봉우리로 이어진 포곡식 ‘강화삼랑성(江華三郞城)’(사적 제130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번지

  • 기사입력 2020.09.26 14:54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 전문가

모처럼 긴 장마도 끝나고 하늘도 가을을 상징하듯 푸르고 시원한 바람까지 스쳐 지나가니 누군들 가을이라 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청명한 날이다. 남문은 보수공사 중이어서 출입을 할 수 없고 동문으로 성내로 들어섰다. 동문은 전돌을 이용해 홍예를 짜고 크기가 다른 큰 돌을 이용하여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크기가 일정치 않은 돌로 홍예기석을 쌓았다. 홍예는 앞뒤가 같은 모양으로 하고 천정은 큰 돌을 이용해 평면을 놓고 바깥쪽 안에는 문을 달았던 흔적의 확돌이 위아래로 각각 있다.

▲ 삼랑성 치성

동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비각이 있고 내부에는 ‘양헌수승전비(梁憲洙勝戰碑)’가 세워져 있다. 즉 1866년 11월 9일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격퇴한 양현수의 지휘 아래 치워진 전투에서 승리한 기념비이다.

이 전투는 1866년 10월 1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주교 탄압과 프랑스 신부 살해를 구실 삼아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군은 연안부 통진부를 습격하여 약탈을 일삼으며 10월 26일 문수산성을 공략하였다. 또한 조선군의 강화도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염하에 정박 중이던 선박을 격침하고 경기 수영을 포격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천총 양현수가 강화도를 잠입하여 격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덕포진 부근에 병력을 매복하기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지세가 험준하고 동쪽과 남쪽 두 길만이 통행이 가능한 천연요새인 정족산성(삼랑성)이 있음을 확인하고 작전 계획에 들어갔다.

천총 양헌수와 중군 이용희는 500여 명의 정예부대를 편성해 11월 7일 염하 도하작전을 개시하였다. 정족산성(삼랑성) 진입을 완료한 양헌수는 프랑스군의 예상 접근이 가능한 동문과 남문에 병력을 중점을 두고 병력을 배치하였다. 11월 9일 프랑스 로즈 제독은 조선군이 정족산성에 입성한 정보를 받고 올리비에 대령에게 병력 160명으로 정족산성을 칠 것을 명령하였다. 프랑스군은 동문과 남문으로 병력을 배치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지형상 및 병력에서 분리한 프랑스군은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양헌수의 효과적인 작전 지휘와 지형상 이점으로 조선군은 시종일관 왕성한 공격력을 발휘하였다. 프랑스군의 승산이 없음을 판단하고 퇴각했다. 이 전투의 승전보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비각을 세우고 비를 세워 길이 역사에 남도록 하였다.

▲ 삼랑성 여장  

바로 이 전투가 있었던 정족산성은 역사적으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아닌가 한다. 정족산성을 삼랑성이라 부른다. 언제 누구에 의해 이곳에 성이 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지리지>에 단군왕검의 세 아들인 부여(夫餘), 부우(夫虞), 부소(夫蘇)를 시켜 쌓았다는 전설의 기록이 있다. 이 전설에 의한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축성 시기에 있어서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 시대 등이 제시되고 있으니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이 미궁으로 남아 있다.

성곽의 양식을 보면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가 훗날 자연석으로 쌓은 흔적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고종 46년(1259)에 성안에 궁궐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고려 시대 이전에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현종 원년(1660)에는 마니산 사고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안에 있는 정족산으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지금은 다시 복원되어 옛 모습을 갖추었다.

▲ 삼랑성 남문  

성의 정문인 남문은 북문과 동문, 서문과는 달리 누각 형태의 조선 시대의 건축물이다. 성은 1738년(영조 14) 기존의 성터에 김노진이 다시 축조하였는데 둘레가 5리에 달하였고 치첩은 705개 였다. 종해루는 영조 15년(1739)에 유수 권교가 수축하고 종해루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영조 40년(1764)에 중수하고 정조 7년(1783)에 유수 김노진이 기문을 지었다고 한다. 1976년 남문을 중수하고 문루도 다시 건립했다.

지금의 남문은 잘 다듬은 화강암을 9단을 쌓고 가운데에 안과 밖에 홍예문을 두었다. 홍예문 위에는 누각을 두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의 좌우 1칸에는 판문을 달았고 가운데 1칸에는 좌우의 판문과 같은 규격의 판문을 2짝 달았다. 누각 앞과 뒤에는 전돌을 쌓아 장여장을 둘렀고 정면의 여장에는 근총안 5개와 원총안 4개를 냈다. 성안 쪽에서 누각을 오르기 위해 좌우에 계단을 두고, 장여장과 좌우에 협문을 달았다.

▲ 삼랑성 남성벽  

남문에서 서쪽 방향으로 축성되어 남문의 동쪽으로 연결된 포곡식 산성이다. 성의 전체적인 모습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갖추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삼국시대에 이르러 토성 위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았고 내탁은 막돌을 채운 석성이 완성되었다.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된 것으로 보인다.

남문에서 서쪽의 성벽은 원래의 지면에서 높게 쌓았으며, 지형의 높이에 따라 자연석을 다듬어 기단석을 두고 그 위에 6단의 자연석을 다듬어 쌓고 총안을 하나씩 냈다. 여장 지붕돌은 자연석을 넓게 다듬어 올렸다. 계단식 여장이 매우 치성까지 이어지는데 지면의 경사도에 따라 여장의 크기도 달라진다. 경사도가 심하지 않은 곳의 여장은 한 타에 3구의 총안을 두었다. 성 따라 오르는 길에는 나무를 이용하여 계단을 두었다. 남쪽의 성벽과 서쪽의 성벽이 만나는 지점에 둥근 형태의 치성을 두었으며, 넓은 공간은 남쪽에서 오는 적을 감시할 수 있다. 치성에서 정상을 향해 축성된 성벽은 크고 작고 형태가 각기 다른 돌을 정교하게 쌓았다. 그 높이만도 4m 정도의 높이고 반듯하면서 지형에 따라 휘어지고 바르게 뻗어 있다. 치성을 지나고부터는 여장을 복원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성상로를 조금씩 오를 때마다 강화해협(염하) 뿐만 아니라 동검도, 인천까지 조망된다. 성벽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잘 남아 있으며 정상에 오르면 여장을 복원하지 않는 상태로 동서남북이 훤하게 조망된다. 평탄한 지형에 바위가 있어 전등사를 내려다 볼 수 있으며 서쪽으로 선두리 해변과 멀리 신도, 시도, 모도 등까지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성은 계곡으로 내려가고 서문이 자리하고 있다. 동문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성문 밖은 경사져 있어 서문과 암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문에서 정족산 정상으로 성벽이 약 80m 이어지다가 갑자기 서쪽 방향으로 약 70m 앞으로 튀어나온 치성이 옹성 형태로 축성되었다. 치성은 원성과 이어지면서 정족산 정상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듯 한다.

▲ 삼랑성 서문  

정상에 이르면 약간 튀어나온 상태로 동쪽 방향으로 꺾어지면서 길게 내려가다 가장 낮은 곳에 암문 형태의 북문이 있다. 4곳의 성문 중에 가장 폭이 좁은 성문의 현문 형태를 띠고 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려면 약간의 경사가 있으며 성문보다 암문으로써의 역할을 중요시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크고 작은 막돌을 이용하여 좁은 통로를 만들고 천정에는 장대석 모양은 큰 돌을 올렸다.

북문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성벽은 다른 곳보다 높은데, 지형이 낮은 곳이어서 성상의 높이를 일정한 높이로 하다 보니 자연히 성벽을 높게 쌓을 수밖에 없는 듯하다. 마치 계곡의 물길이 휘어지는 듯한 모습이 지형을 따지 축성하다보니 굴곡이 심하다. 동쪽으로 내려가며 쌓은 성은 동문 방향으로 꺾이면서 치성을 쌓고 성벽은 동문 방향으로 내려가며 쌓았는데 복원을 하면서 여장을 통여장으로 하고 총안을 하나씩 두었다. 통문을 지나면 남문과 연결된 성벽은 잘 남아 있고 여장은 무너진 채로 그대로 남아 있으며 성벽의 끝에 치성이 위치하고 있다. 치성은 남문 방향으로 꺾이면서 급경사에 높은 성벽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으로 여장을 두고 원총안 2개와 근총안 1개를 내었다. 

정족산의 삼랑성은 5개의 봉우리로 이어져 있으며, 성은 계곡과 능선을 아우린 포곡식으로 축조되었다. 전체 둘레가 2.3km에 이르며, 220m산정산부에서 남문 쪽 해발 75m 정도의 능선까지 내려와 있다. 성 둘레에는 4개의 성문과 4개의 치성이 있을 뿐 다른 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성 가운데 해당하는 자리에는 고려 시대에 창건의 역사로 보는 전등사가 자리하고 있다. 서문 방향의 남

쪽 기슭에는 1259년(고종26)에 궁궐을 지었다고 전하는 고려가궐터가 있는데, 1264년(원종 5)에 불사가 설행되어 원종이 친히 행차하였다고 전한다. 1660년(현종 1)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마이산사고가 정족산성 내에 장사각을 지어 옮기면서 ‘정족산 사고’라고 불렀다. 이때 왕실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도 함께 건립되었다. 조선 시대에 강화도가 한양을 방어하는 외곽 기지로 중시되면서, 고려가궐터에는 정조 때 정족진(鼎足鎭)의 군창(軍倉)인 정족창(鼎足倉)이 설치됐다.

고려가궐터는 평탄한 건물터와 곳곳에 사용되었던 석재가 남아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를 보호할 목적으로 설치한 군사 주둔지 정족진이 있던 곳이다. 1907년 방화로 소실된 것을 2009년 발굴 조사에서 드러난 11개소의 건물지를 포함해 대규모의 유구가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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