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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DNA를 찾아서(16회) 북방민족이 중국 대륙에 건설한 마지막 제국 ‘대청’

북방민족 여진이 세운 나라 ‘청’의 기원과 흥망

  • 기사입력 2021.01.19 08:45
  • 기자명 김석동
▲ 필자 김석동  

2. 북방민족이 중국 대륙에 건설한 마지막 제국 ‘대청’

북방민족 여진이 세운 나라 ‘청’의 기원과 흥망

16세기 말 임진왜란과 반란, 부패 등으로 ‘명’의 국력이 쇠퇴일로를 걷는 가운데 만주 일대에서는 해서·건주·야인 등 여진족이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건주여진의 영웅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여진족을 통합하여 1616년허투알라赫圖阿拉(혁도아랍)23에서 ‘칸’으로 즉위,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했다. 이것이 12세기 여진족이 세운 ‘금’을 이은 후금이다. 누르하치는 이름이며, 성은 아이신교로愛新覺羅이다. 만주어에서 아이신愛新은 금金,교로覺羅는 일족을 의미하므로 김씨金氏라는 뜻이다.

누르하치를 이어받은 홍타이지皇太極는 만주족의 팔기군을 장악하고 외몽골과 내몽골까지 병합하여 만주·몽골·한족의 다민족 국가를 출범시켰다. 그는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고치고 1636년 황제로 즉위하여 청나라의 기초를 다졌으나 명나라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홍타이지 사후, 아들 순치제가 다섯 살의 나이에 황제 자리를 이어받으면서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었지만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 도르곤의 섭정으로 안정을 찾게 됐다. 도르곤은 북경을 점령하는 등 중국 정복의 발판을 마련했으나 사냥터에서 돌연 사망해 순치제의 친정이 이루어졌다. 순치제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 왕조 중국 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순치제를 이어받은 강희제는 61년을 재위하면서 눈부신 내치와 외정의 업적을 쌓아 청의 중국 지배를 완성했고, 이후 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청 전성기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명의 반란을 진압하고 대만

을 정벌하는 한편,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외몽골·티베트에 이르는 정복 전쟁을 계속했다. 강희제가 죽은 뒤에는 치밀하고 성실한 성격의 소유자인 옹정제가 반대파를 제압하고 즉위하여 황권 강화와 내정 개혁을 통해 절정기인 건륭 시대의 기반을 닦았다. 그는 외치에서도 티베트 원정을 마무리하고, 운남·귀주·광서 등 중국남부까지 평정하여 최대 영토의 기틀을 마련했다. 6대 건륭제는 63년 재위하면서 내정을 안정시키고 문화를 융성시키는 한편 준가르, 위구르, 타이완, 미얀마, 베트남, 네팔 등 광범위한 주변국 원정과 평정에 나서 청淸 대통일 시대를 구가했다.

건륭 말년 이후 정치부패와 국정혼란이 이어지면서 ‘백련교도의 난’등 각처에서 반란과 봉기가 일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1·2차 아편 전쟁(1840, 1856년)에서 청일 전쟁(1894년)에 이르기까지 외국 세력의 중국 침

탈이 가속화되면서 거대한 청은 와해됐고, 1912년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가 퇴위하면서 276년 역사는 막을 내렸다. 이에 중국 마지막 왕조이자 선비, 요遼, 금金, 원元에 이은 마지막 북방민족 여진의 중국 지배는 종지부를 찍었다.

대통일제국 청과 한반도 역사

고려 말 함경도 지역에는 여진인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 이들은 4대조가 동북면으로 이주했고, 나중에 조선의 태조가 된 병마사 이성계를 군사적으로 뒷받침한 배후 세력이 되었다. 태조는 개국 후 여진족 동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 이후 여진족에 대해 조선 조정은 강·온 양면의 정책을 교차했다. 16세기 중반까지 중국의 분열 정책으로 만주 일대에서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누르하치가 등장하면서 세력이 규합된다. 누르하치는 명나라가 임진왜란(1592~1598년)으로 조선에 원병을 보내는 시기에 여진족을 통합해 후금을 건국하게 된다.

후금이 건국되던 1616년은 조선 광해군 8년으로, 명·청 교체기라는 대륙의 큰 소용돌이가 한반도에도 높은 파도를 일으켰다. 당시 광해군은 동북아 국제 정세를 대신들과 달리 정확히 꿰뚫어보고 명을 일방적으로 의존하기보다 등거리 외교 전략을 택했다. 후금이 요동 지방으로 진격해오자, 명은 임진왜란 당시 지원에 대한 보답을 명분으로 조선군 파병을 요구(1618년)해왔다. 광해군은 마지못해 파병했지만 명·청의 패권 전쟁인 사르후 전투24 패전 후 추가 파병은 묵살했다. 이후 후금과 큰 마찰 없이 지냈으나, 광해군 15년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가 명과의 관계 개선과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을 내세우면서 후금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금은 명 정벌에 앞서 배후의 조선을 미리 제압하기 위해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구실을 내세워 1627년 3만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했다(정묘호란). 조선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고, 이어지는 후금의 전방위 압력으로 ‘형제의 맹약’을 맺고 전쟁은 끝났다.

이후 후금의 국경침입, 신속臣屬과 파병 요구 등이 이어지면서 인조의 조선에서는 척화배금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에 국호를 청으로 바꾼 태종 홍타이지는 1636년 12월 1일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 침공에 나섰다. ‘병자호란’으로 불리는 이 전쟁에서 청군은 선양을 떠나 10 여 일 만에 수도에 육박하는 전광석화 같은 작전으로 조선을 압박했고, 급한 나머지 일단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와 조정은 청군에 포위되어 끝내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다음해 1월 30일 청 출병 후 2개월 만에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이때 있었던 ‘쌍령 전투’의 패배는 앞서 기마군단의 전력을 설명하며 기술한 바 있다. 이후 양국관계는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이 패배할 때까지 지속됐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이르는 강희·옹정·건륭 시대(1661~1799년)는 청나라 최전성기였고, 조선은 현종·숙종·영조·경종·정조(1659~1800년)가 재위하였다. 이 시기에 청은 대제국을 완성하고 세계와 교류하

면서 문물을 발전시켰고, 조선은 청을 통해 문물 교류 기회를 확대했다.

현대 중국의 영토는 몽골, 연해주, 카자흐스탄 일부, 대만 등을 제외하고는 청 제국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00만 명도 안 되는 만주족이 1억 명이 훨씬 넘는 한족을 지배한 청은 다민족 국가를 형성해 강대한 국가로 성장했다. 중국 헌법 전문을 보면 “중화민국은 전국 각 민족 인민이 공동으로 건설한 다민족 통일국가”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민족의 청이 현대 중국의 모태가 된 것이다. 바로 이 중국이 지금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했고, 한국과의 관계도 과거 어느 때보다 긴밀하다. 중국은 한국의 제1 교역국이며, 한국은 단일국가 중 미·일에 이어 중국의 세 번째 교역국이다. 양국은 지금 병자호란 이후 청일 전쟁까지 이어진 259년간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교류와 협력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청을 세운 만주족과 한민족의 연결고리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12세기에 여진족이 세운 나라 금을 잇는 다는 의미로 나라 이름을 대금大金이라 했다. 119년간 존속한 금은 여진족 추장 아골타가 세웠으며, 그는 고려(고구려)에서 온 김함보의 후예이다. 전원철 박사에 의하면 누르하치는 아골타의 약 20대 후손이다.

발해 건국자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의 4대손인 금행의 둘째 아들이 함보이며 함보의 7대손이 아골타, 아골타의 약 20대손이 청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만주 일대에서 활약한 여진족의 실체는 앞서 기술한 대로 고대로부터 만주 일대에 살던 사람들로, 그 지역이나 민족에 대해 중국은 시대별로 이름을 바꿔 불렸을 뿐이다. 이들의 명칭은 청대에 와서 홍타이지에 의해 ‘여진족’에서 ‘만주족’으로 바뀌었다.

《금사》와 《만주원류》에는 그들과 한민족간의 관계를 시사하는 내용들이 다수 있다.

* 金史(世紀)

◦ 金의 조상은 말갈씨에서 나왔다. 말갈족의 원명은 물길勿吉이라 불렸다.

◦ 물길은 고대 숙신肅愼땅을 말한다.

◦ 金태조 아골타는 ‘여직女直과 발해渤海는 본래 한 집안’이라 했다.

* 만주원류고(청 건륭황제 때 황실 역사서2)5

◦ 사책史冊에서 또 이르기를 ‘금나라의 선조는 말갈부靺鞨部에서 나왔는데

옛 숙신肅愼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우리 왕조가 처음 일어났을 때, 구칭舊

稱인 만주滿珠에 소속所屬된 것을 “주신珠申”이라 하였다. 나중에 만주滿珠

라는 칭호를 고쳐 한자로 그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말과 글이 그릇되어

서 만주滿洲로 되었지만 사실은 바로 옛 숙신이요, “주신珠申”은 숙신肅愼

이 조금 변하여 달리 나는 소리이니 강역疆域이 같은 것임이 더 한층 분명

하게 증명되었다고 하겠다.

◦ 우리 왕조가 얻은 성씨는 애신각라愛新覺羅라 한다. 우리나라 말로 금金

을 “애신愛新”이라고 하니 금원金源(금나라)과는 갈래가 같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하겠다.

◦ 《금사金史·세기世紀》에는 “당나라 때 말갈에 발해왕渤海王이 있어 10여

대를 전하였으며 문자文字와 예악禮樂(문화)이 있었다”고 하였던바, 말갈

은 곧 금나라의 선대이니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여진족이 활동한 만주 일대는 고조선·부여에 이어 고구려의 땅이었다. 당나라 시대 돌궐과 고구려는 동맹 관계로 당을 양쪽에서 견제했다. 돌궐이 분열 등으로 멸망한 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나 돌궐에서는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돌궐 멸망 30년 만에 영웅 쿠틀룩이 후돌궐을 일으켰다. 한쪽에서 당의 견제 세력이 다시 등장하자, 고구려가 멸망한 만주 지역에서도 30년 만에 후고구려 세력이 일어났다. 이 나라가 바로 영웅 대조영의 발해이다. 30년 만에 당, 후돌궐, 발해의 삼각관계가 다시 형성됐다.

발해의 건국으로 한민족 역사가 만주 일대에서 이어지게 됐다. 우리 역사의 핵심을 이루는 고구려를 이어받은 발해는 이후 거란에 의해 멸망했으나, 발해 땅과 그리고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은 사라져 버리지 않았다. 그 땅과 그 사람들이 여진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그래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나아가 청나라 역사를 우리 역사와 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진족을 단순히 중국적인 시각으로 북방민족의 하나, 또는 오랑캐로 생각해서는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없다. 박은식, 김교현 선생은 금사金史를 한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손진태 교수는 여진사와 금사를 한국사에 포함시켰다. 이는 우리의 역사는 한민족의 삶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우리 민족의 본류라 인식되고 있는 예맥은 동호, 숙신과 같은 이름으로 만리장성 이북의 동북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의 총칭이었다. 이들 중 만주 지역에 남아있던 숙신은 후일 물길, 말갈, 읍루, 여진, 만주족 등으로 불렸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사기 흉노전에 등장하는 ‘동호’는 고조선古朝鮮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선비는 동호의 후예이고, 선비에서 유연, 북위,거란, 몽골이 유래한다는 사서와 연구는 우리의 고대사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단재 선생은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고·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서 돌궐, 헝가리, 터키, 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는데…”라고 쓰고 있다. 청나라를 건국해서 오늘 날 중국이 있게 한 여진족 역시 과거 우리와 친연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북방민족은 만주·몽골 일대에서 흥기하여 중원을 지배해온 중추세력으로, 야율아보기의 요나라, 아골타의 금나라, 칭기즈칸의 원나라, 누르하치의 청나라 등으로 맥을 이어왔다. 그 최후의 나라가 청나라이다.

1912년 선통제를 끝으로 청이 망하자, 북방민족의 만주와 중원 지배도 그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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