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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층 큰언니

  • 기사입력 2021.09.13 09:56
  • 기자명 김희재 작가
▲ 김희재(수필가,한국어 교육 전문가)    

 벨 소리에 나가보니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서 있었다. 처음 보는 부부와 아들 둘, 딸 하나가 정중히 인사했다. 우리 집 바로 위층에 산다며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아들은 둘 다 중학생이고, 딸은 곧 초등학교에 들어갈 유치원 졸업반이란다. 중학생들이 쑥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꾸벅 인사했다. 통통한 유치원생 아가씨도 몸을 배배 꼬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 절로 웃음이 났다. 아이들을 조심은 시키겠지만 쿵쿵거리는 소음이 발생할 수도 있을 테니 양해해 달라며 부부가 조심스레 파운드 케이크 상자를 건넸다. 온 가족이 모두 아래층 사람들에게 얼굴 익히러 온 것만도 고마운데 선물까지 들고 왔다. 새로 입주한 아파트라 다들 낯선데, 먼저 찾아와 주니 정말 기뻤다. 

  남자들은 인사만 하고 서둘러 자기 집으로 올라가고, 마침 나 혼자 있으니 꼬마 아가씨랑 엄마는 잠깐 들어와 집구경이나 하고 가라고 붙들었다.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우리 식구 소개를 했고, 서로 전화번호도 주고받았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물어 ‘13층 00씨’라고 저장했다. 나이가 몇이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아이들로 미루어 40대 중반쯤 될 것이라 짐작했다. 

  그녀는 맞벌이라 늘 바쁘다고 했다. 나는 아들 둘이 다 결혼해서 손주가 넷이고, 이 집에선 늙어가는 부부 둘이서 살고 있다고 답했다. 혹시 꼬마 아가씨를 집에 혼자 둘 일이 생기면 우리 집으로 내려보내라는 말도 했다. 그건 동갑내기 손녀를 둔 할머니의 진심이었다.

  

  안면만 겨우 트고 서로 왕래 한번 제대로 못 했는데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너나없이 막연한 두려움에 떨며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불안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웃집 문을 두드리기 힘든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다들 거리두기를 하며 집에 머물렀다. 몇 년 만에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생이 되길 손꼽아 기다렸던 꼬마 아가씨는 끝내 입학식도 못 하고 말았다. 그래도 엘리베이터에서 중학생 아들과 마주치면 정말 반가웠다. 아파트 현관문 앞에 서서 상견례 한 덕분이었다. 내가 먼저 아는 체하며 말을 붙이면 녀석은 어색해하면서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그렇게라도 대꾸해 주는 것이 사춘기 소년으로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기에 더 흐뭇했다. 

  미국에 있는 맏손녀 나경이랑 동갑이라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꼬마 아가씨는 어쩌다가 산책길에서라도 보게 되면 냅다 뛰어와 마스크 위로 빼꼼한 눈에다 웃음을 가득 담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나도 모르게 ‘아유 이쁜 내 새끼’ 소리가 절로 튀어나오려고 했다. 볼 때마다 자꾸 나경이와 오버 랩 되었다.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오니 우리 집 현관문에 커다란 검정 비닐봉지가 매달려 있었다. 봉지 속엔 이름 모를 산나물과 제멋대로 생긴 가지 다섯 개, 풋고추 두어 줌, 살짝 꼬부라진 오이 몇 개가 들어있었다. 척 봐도 시장에서 파는 물건은 아니고 집에서 직접 길러 식구들에게 먹이는 것이었다. 봉지 속엔 메모도 들어있었다. “친정엄마가 산에서 뜯은 나물을 많이 보내셨기에 조금 나눕니다. 더 드시고 싶으면 말씀하셔요. 두 분만 사시는데 너무 많이 드리면 부담스러우실까 봐 아주 조금만 담았거든요.” 어떤 것보다도 귀하고 고마웠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이 값진 그 채소 덕에 낯선 동네로 이사 와서 적응하느라 팍팍하고 삭막하던 나의 마음에도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지금은 한국어 명사로 굳어진 ‘아파트’라는 말은 원래 ‘분리하다’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에서 유래한 영어 단어(Apartment Building)를 우리 식으로 변형한 것이다. 아파트는 처음 만들 때부터 타인의 간섭에서 벗어나 확실하게 개인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기능을 많이 부여한 독립적 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여러 집이 켜켜이 포개어져 있는 구조의 집에서 사람들은 철저히 분리되어 살아간다. 더욱이 요즘처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외면하는 게 미덕이 된 세상에서는 아파트 이웃들이 서로 소통하며 가까이 지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아래 위층은 까딱하면 층간소음, 누수 등으로 인해 각박하게 다투는 사이가 되기 쉬운데, 그녀가 먼저 따스한 손을 내밀었다. 덕분에 우린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나누는 이웃, 위급 상황이 닥쳤을 때 서슴없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촌이 되었다. 

  시골에 사신다는 그녀의 친정 엄니가 보내주는 푸성귀와 과일즙 등은 내게도 종종 왔다. 나도 무엇이든 넉넉하게 생기면 갖다 주게 되었다. 냉장고에 보관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어서 좋고, 음식물 쓰레기를 안 만들게 되니 더 좋았다. 비 오는 날 별식을 만들어도 비 맞을 염려 없이 갖다 줄 수 있어서 편했다. 먹을 거 해 놓았으니 오너라 가거라 하지 않고도 쉽게 나눠 먹을 수 있는 게 제일 좋았다. 이래서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속담이 생긴 모양이다.

   지금은 벨을 눌러서 아무도 없으면 문 앞에 두고 메모지 대신 문자를 보낸다. 잘 먹겠다는 감사 인사도 문자로 전한다. 그렇다고 자주 만나는 건 아니다. 그저 잘 있겠거니 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일상을 열심히 살면서 든든히 여길 뿐이다.

  얼마 전에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13층이에요. 좀 더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호칭을 언니 또는 이모 등등 소심하게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그녀가 이모보다 언니라는 호칭을 앞에 써 놓은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사실 형제가 많은 집에선 스무 살 터울도 드문 일이 아니다. 나는 살짝 장난기를 담아 이렇게 답장했다.

  “이왕이면 나는 그냥 나이 많은 큰언니 하고 싶네요.”

  문자 보낸 지 30초도 채 안 되어 즉각 답장이 왔다. 

  “하하. 워낙 젊게 생각하셔서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이보다 생각이 우선이지요.”

  이렇게 나는 염치 불고하고 ‘아래층 큰언니’가 되었다. 이모뻘 되는 나를 ‘생각이 젊으니 언니’라고 부르겠다니 정말 고맙다. 후일에 나경이와 꼬마 아가씨를 같이 만나게 되면 촌수가 좀 복잡하겠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그날 나는 기분이 좋아, 온종일 괜히 혼자 벙싯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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