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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해탈하신 보살이셨다

"4월이 오면 라일락 향기는 나를 어머니에게로 인도"

  • 기사입력 2022.05.25 17:17
  • 기자명 이석복 작가
▲ 歡喜 이 석 복(수필가, 차세대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오랜만의 산책길에 느닷없이 진동하는 라일락 향기에 취해 4월말 자연의 경이로움은 신의 예술임을 새삼 느꼈다. 가벼운 산책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아파트 옆단지를 통과하는데 조경수로 심은 라일락 꽃 향기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마침 돌아가신 어머니가 즐겨 찾으시던 낯익은 노인정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2남 2녀의 자녀를 두셨지만 가풍(家風)인지 우리나라 전통 풍습 때문이었는지 장남인 나를 유달리 우대해 주셨다. 예를 들면, 항상 아침에는 나는 아버지와 소반(小盤)의 겸상을 따로 하고 어머니와 동생들은 원탁밥상에 둘러앉아 반찬싸움하면서 밥을 먹었었다. 

그런 특별대우를 받은 내가 성장해서 결혼을 하고도 직업군인 생활을 하느라 잦은 근무지 이동 때문에 부모님을 모시지를 못했다. 아내도 전역하면 우리를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부모님을 모시자고 했었다. 그런데 뜻밖에 미국으로 이민 가셨던 장모님이 지독한 향수병으로 위독한 상태까지 이르렀다는 통보를 받았다. 부모님과 동생들까지 모여 가족회의를 한 결과 미국에 계신 장모님을 모시고 살게 되었다. 아내는 홀로 되신 장모님의 외동딸이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의 옆단지로 동생이 부모님을 모시고 이사를 와서 자주 뵐 수 있도록 했는데 그때는 몰랐는데 알고 보니 그 아파트단지에 라일락 꽃나무가 많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시집오기 전 대가(大家)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그런지 자존심이 유독 강하셨다. 그리고 지혜로운 분이셔서 연세가 드신 후에는 어느 모임에 가셔서도 자연스럽게 큰 어른의 위치를 확보하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 의식적으로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신 적은 없었지만, 며느리들이 어머니의 위상 유지를 위해 눈치껏 노인정을 찾아서 어르신들에게 간식이나 점심대접을 해드리곤 했었다. 아버님이 먼저 세상을 뜨시고 15년 후 어느 날 어머니가 집안에서 넘어지셔서 처음엔 다리가 좀 불편하신 줄 알았다. 며칠 지나면서 고통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서 동생이 병원에 모시고 갔더니 노인들에게 치명적이라는 고관절 골절을 참고계신 것이었다. 연세가 아흔여섯 이셨지만 대체로 건강하셔서 다행히 수술이 가능하다는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인공 고관절 수술을 받으셨다. 그래도 고령(高齡)이시라 수술 후 전신마취에서 깨어나실 때까지 긴장되고 초조해서 식은 땀가지 흘렸는데 거뜬히 회복하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병원에서 입원하고 계신 기간 중에 우리 형제들은 사후(事後)대책을 논의한 결과 재할운동을 할 수 있는 요양병원으로 모셨다가 어느 정도 걸어 다니실 수 있으면 집으로 모시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모았다. 어머니께 내가 잘 알고 있고 주변 환경이 뛰어나며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안성의 요양병원으로 모셨다가 재활운동 후 집으로 가시자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더니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시고 흔쾌히 동의해 주셨다. 요양병원을 꺼리실 줄 알았는데 이미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 요양병원 이사장 스님은 내가 예비역 군불자회를 설립할 때 힘이 되어 주셨던 분으로 불교계 사회복지분야 개척자이시기도 한 분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가 요양병원에서 외롭지 않으시도록 각각 일주일에 한 번씩 문병하기로 하였다. 나는 시간을 낼 수 있는 일요일을 당번일로 했고 동생들도 각각 요일을 정하고 시간여유가 있는 막내 여동생은 시간을 더 내겠다고 자원했다. 병실 담당 간병인은 조선족 출신 중년 여성이었는데 다른 다섯 분의 환자분들은 거동할 수 있으셔서 거동이 어려운 어머니에게 더 많은 신경을 쓸 수 있는 여건이 되어 다행이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떠난 후 어머니를 일주일에 한 번씩 이렇게 자주 찾아 뵌 것은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처음에는 집(안양 평촌)에서 요양병원까지 차로 1시간 30분 내외의 거리여서 다소 부담이 된다고 느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우리 부부는 오히려 일요일에 어머니를 찾아뵙는 일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우리가 어머니를 뵈러 갈 때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음식과 과일 등을 준비해서 같이 계신 환자분들과도 나누었다. 그런 다음 휠체어로 재활운동실로 모시고가서 운동을 시켜드리고 밖으로 나와 주변경관을 즐긴 후 맨윗층 6층에 있는 법당(法堂)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기도드리는 것이 우리의 대체적인 일정이었다. 그런데 재활운동을 하셔도 다리에 힘이 붙지 않으셔서 차도가 없으신 게 마음에 걸렸다.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후 대여섯 달 뒤, 첫 추석에는 집으로 모셔 아버님 차례를 지내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음식과 떠들썩한 대화로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려고 자식으로서 애썼다. 

이런 우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뜻밖에도 빨리 병원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셨다. 휠체어와 병원식 침대도 준비해 드려서 나름대로 정성을 다하고자 했었다. “왜 그러시느냐? 뭐가 불편하시느냐?” 고 여쭤보아도 “그냥 아니다. 그냥 병원으로 가고 싶다.”라고 하시는 말씀만 되풀이 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가 집에 계시는 것을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빨리 병원으로 가고 싶으시다니 솔직히 엄청 당황했고 그 이유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일주일 정도 체류하실 예정이었던 것을 추석 다음날인 3일로 단축해 끝내고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며칠 후 병원에서 뵈니까 더 편안하게 만족해하시는 것 같았다. 그사이에 간병인의 돌봄이 더 편해지셨고 같은 방 할머니들과 익숙해지셨으며, 우리들의 방문을 기다리는 즐거움이 더 좋으신 것 아닌가 할 정도로 나름대로 짐작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어느덧 내가 찾아뵐 때 재활운동을 점점 더 힘들어 하셨고, 동생들이 당번 날엔 아예 재활운동을 못하시겠다고 하시면서 나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들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아범, 나는 너희들이 잘해줘서 너무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도 나는 그래도 어머니가 행복해 하셔서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곧 이어 연세가 아흔 일곱이 되셨고 설날에도 집에 안가시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먼저번 추석 때 일도 있고 해서 더 이상 말씀드리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왔을 때도 재활운동이 너무 힘들어 못하시겠다고 사정을 하셨다. 법당에 모시고 갔더니 합장도 못하시고 부처님상만 힘없이 쳐다보기만 하셨다. 그제서야 어머니의 기력이 쇠진해 지신 것을 확인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뭔가가 뻐근하게 치밀어 오면서 아려왔다. 

그날 그 순간 어머니의 표정은 밝으신 편이었고, 전혀 고통스러워 하지도 않으셨다. 어머니는 눈으로 모든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나누셨다.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시려고 애쓰셨다. 이미 해탈(解脫)의 경지에 드신 보살(菩薩)이셨다. 얼마 후 우리 온 가족은 어머니의 손을 꼬옥 잡고 어머니의 귀에 “우리를 정성껏 바르게 키워주셔서 행복했습니다.”라는 말씀을 드린 후 다함께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는 가운데 어머니께서 극락(極樂)으로 가시는 길을 전송해 드렸다. 

언제나 4월말이 오면 라일락 향기는 나를 어머니에게로 인도한다. 어머니는 라일락 향기보다도 더 고귀한 향기로 자식들을 키우셨던 것을 어찌 잊겠는가. 생전에 노인정에 계셨던 어머니를 라일락 향기 속에서 찾고 있는 나 조차도 팔순의 지긋한 인생길이다. 4월의 라일락 향기는 이제 해탈하신 어머니의 사랑이 되어 가슴에 가득 차는 환희(歡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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