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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NGO]독립신문과 서재필 잘못 알려져 있다!

  • 기사입력 2019.12.30 13:50
  • 기자명 역사의병대

‘독립신문’은 1896년 한글과 영문으로 발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 일간지(처음에는 격일간지로 시작)로서 자주독립 정신과 갑오개혁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선각자적 역할을 신문으로 알려져 그 발간 일을 ‘신문의 날’로 정했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창설자 서재필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고 국립묘지에 안장했으며, 서대문 독립공원 등에 동상을 건립하고 역사교과서에서는 독립신문과 서재필을 자주독립의 기수였던 것처럼 좋게 기술하고 사진까지 게재하고 있다.

반면, 전 경상대학교 려증동 교수의 『부왜역적 기관지 독립신문 연구』에 의하면 필립 재슨(미국에 귀화한 서재필의 이름)이 국가 돈으로 설립하여 개인 이익을 챙겼으며, 독립신문의 보도성향이 ‘한국 업신여기기’ ‘청국 배척하기’ ‘일본 칭찬하기’ 등이었으므로 ‘왜로 앞잡이 신문’이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따라서 대중들은 독립신문과 서재필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실제 독립신문의 보도 내용을 확인하면 그런 의문이 해소될 수 있으므로 려 교수가 분석한 당시의 신문 내용 중 중요한 내용을 뽑아 수회로 나누어 보도한다.

대역부도죄인(大逆不道罪人) 서재필과 미국인 필립

서재필은 1864년에 전남 보성의 외갓집에서 태어나 7세 때 양자로 입양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1882년 과거에도 급제했고, 우리나라 두 번째 일본 유학생으로서 일본 육군소년학교를 졸업하는 등 만19세까지(1866~1884)는 서재필로 살았다. 그러다가 19살 때 일본 군인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대신 7명을 살해한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실패 후, 일본의 도움을 받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도주하여 스무 살 때부터는 미국사람 필립 재슨(Philip Jaisohn)으로 살았다.

도주한 후 대역부도죄인(大逆不道罪人)이 된 그의 아버지, 형, 아내가 참형을 당하기 직전 자살을 하고 아우가 참형을 당했으며, 어린 아들은 굶어죽었다. 과연 그가 이 나라를 조국으로 생각하고 잘 되기를 바랬을 것인지 의문이 가는 장면이다.

그런 그가 미국에 들른 박영효(朴泳孝)로부터 대역부도죄가 1895년 3월 1일자로 사면되었다는 사실과 정권을 장악한 개화파 동지들이 자신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1895년 12월 26일 귀국하였으며,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그를 외부협판으로 내정하고 교섭하였으나 ‘나는 미국인이므로 입각은 할 수 없다’고 하여 월봉 300원의 거액을 지불하면서 그를 10년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하고, 신문 창간을 지원하였다.

창립한 필립 재슨(서재필)은 ‘국고(國庫) 날치기’!

독립신문은 1895년 정부에서 설립자금 4,400원(시설비 3,000원, 필립 거주 집값 1,400원)을 미국사람 필립 재슨(서재필)에게 지원하여 설립이 되었으니 분명히 정부의 재산인데, 필립이 빌린 돈 4,400원만 갚으면 신문사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여 개인소유가 되었다(신용하의 독립협회 연구) . 

뿐만 아니라, 1898년 필립을 추방하기로 결정하자 그는 자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외부 고문관으로 10년 계약을 맺었는데 아직 7년 10개월이 남았으니 그 기간의 월급 28,200원과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 600원 등 28,800원을 요구했다. 계약 위반을 핑계로 일도 하지 않은 기간의 임금을 받아 챙긴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그 돈 중에서 자신이 처음에 정부로부터 받은 돈 4,400원을 공제하고 24,400원을 요구한 것인데, 당시 부왜역적들이 장악하고 있던 조정이었으니 그의 요구대로 지불했으며, 심지어 12월 9일에는 이미 미국으로 추방된 필립에게 4,000원을 주고 독립신문을 사들였다. 정부 돈으로 창립한 신문사를 정부에게 팔아먹었으니 이중 착복을 한 셈이다.

여기에 신문사 이익금 년 600원씩을 따로 챙겼으니 필립(서재필)이 자기돈 하나도 들이지 않고 독립신문을 통해 챙긴 이익금은 34,000원이었다고 한다. 정부 돈으로 신문사 차려 이익금 챙기고, 결국 그 신문사는 정부에 팔아먹었으며, 일도 하지 않은 7년 10개월의 임금을 받아갔으니 ‘날도둑놈’이었던 것이다.

▲ 서재필 기념공원 조감도 

  

“독립신문은 나라가 넘어지도록 도모하는 신문!”

독립신문은 고종 33년(1896) 4월 7일부터 고종 36년(1899)년 12월 4일까지 3년 9개월 동안 총 776호를 발행했다. 이 기간을 4개기로 나누어 보면, 제1기는 창립한 필립 재슨(서재필)이 1896년 4월 7일부터 1898년 5월 10일까지 2년 1개월간 사장을 한 기간이고, 제2기는 윤치호가 사장을 한 1898년 5월 17일부터 1899년 1월 7일까지 8개월, 제3기는 1899년 1월 8일부터 5월 30일까지 5개월 동안은 사장이 없었던 기간, 제4기는 폐간 직전 영국인 선교사였던 앰벌레가 사장을 했던 1899년 6월 1일부터 12월 4일까지 6개월이다. 

당시의 신문은 사장 겸 주필이 거의 대부분의 원고를 작성했으므로 신문의 보도내용을 보면 그 사장의 의식을 알 수 있는데, 창립 당시의 보도성향이 끝까지 지속된 독립신문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창립 사장 서재필의 의식성향을 엿볼 수 있다.

독립신문에서는 토왜의병들을 ‘비도(匪徒, 나쁜 놈들)’라고 칭했으며, ‘우리를 청나라로부터 독립시켜준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고 보도하는 등 일본을 비호하는 내용이 많다. 그래서 1896년 7월 9일 진사 정성우(鄭惺愚)가 “흉칙한 무리 재필이가 만들고 있는 독립신문은 나라가 넘어지도록 도모하는 신문입니다.”는 요지의 소를 임금에게 올릴 정도였으니 요즘 인터넷에서 거론되는 ‘일본 간첩’이었다는 소리를 들을 만도 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부왜역적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그를 내치지 않았다.

독립신문 분석은 부왜역적 행위의 증거!

1890년대의 독립신문, 독립협회, 독립문 등의 ‘독립’은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일본이 우리나라를 독립시켜주었다는 ‘독립’으로서 모두 서재필이 사실상 주도한 부왜역적들의 작품이었다. 

그런데도 나라에서는 그의 자주독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고, 1994년 미국에 있던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그리고 국사교과서에서 독립신문과 서재필을 좋게 평가하여 사진까지 게재하고 있으며, 서울 서대문의 독립기념공원에 그의 동상을 세운 것으로 부족하여 전남 보성군의 ‘서재필 기념공원’에는 그의 동상은 물론 서재필 기념관과  추모탑이 세워져 있고, 모의 독립문과 개화문, 자강문, 사당 등도 건립되어 있다. 이러니 대중들이 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독립신문의 보도내용을 직접 확인해보면 서재필의 의식성향과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탈하는 데 독립신문과 서재필이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알고 바른 평가를 할 수 잇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신문의 보도 내용을 연재하고자 하는 것이다. 혹시 잘못된 내용이나 또 다른 자료가 있으면 알려주시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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