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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왕의 어제어필이 쓰인 인평대군 ‘치제문비(致祭文碑)’

  • 기사입력 2020.01.07 17:01
  • 기자명 정진해(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 : 인평대군묘 및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제130호), 인평대군치제문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5호)

소재지 : 경기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산46-1번지

 인평대군 묘 

포천의 진산인 왕방산(736.7m)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덕령산(350m)의 현무봉아래 풍수에서 귀인단좌형이라 불리는 곳에 인조의 셋째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인 이요( 1622~1568)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묘역은 왕릉만큼이나 넓은 면적에 제실, 신도비, 치제문비, 묘를 갖추었다. 본래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는데 숙종 19년(1693)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인평대군에게는 복녕군, 복장군, 복선군, 복평군 네 아들이 있었다. 장남 복녕군은 32세로 일찍 죽고, 나머지 3형제는 숙종 때 역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사사되었다. 이른바 ‘삼복의 옥’이다. 그 후 후손들이 인평대군의 묏자리가 길하지 못하여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그 후 후손 중에 남연군과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고종과 순종이 배출되었다.

인평대군은 병자호란 후인 1640년 두 형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과 함께 청에 인질로 끌려갔었다가 이듬해 돌아와서는 심양을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다. 인조의 뒤를 이은 봉림대군이 제17대 왕 효종으로 등극하면서 동생인 인평대군을 총애하였다. 그러나 37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효종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직접 제문을 짓고 비문을 썼다.

인평대군 묘역

현무봉 아래 자리 잡은 묘를 보호하고 살기를 띤 바람이 봉분 안으로 들이치지 못하게 하는 곡장을 둘렀다. 곡장은 회 벽돌을 쌓고 그 위에 기와를 올린 모양으로 조선 시대에 왕릉과 왕족의 묘인 원에만 설치가 허락되었던 제도였다. 봉분은 원형의 호석을 두른 복천부부(福川府夫人)인 오씨(吳氏)와의 합장묘인 단분이다. 봉분 앞에는 효종 9년(1658)에 세운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놓였다. 묘비는 조선 전기에 유행했던 ‘비좌규수’의 양식을 따랐다. 비좌의 4면에는 4구역을 나누어 아래 칸에는 구름무늬를 새겼고 위 칸에는 덩굴무늬를 새겼고 윗면에는 둥글게 처리하여 복엽을 둘렀다.

비명에는 ‘有明朝鮮國麟坪大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贈諡忠敬公之墓 福川府夫人吳氏 左(유명조선국인평대군겸오위도총부도총관증시충경공지묘 복천부부인오씨부좌)' 의 명문과 戊戌九月初三日(무술구월초삼일)의 건립 기문이 새겨져 있다. 봉분 좌측에는 비신이 남아 있지 않은 귀부 1기가 있는데 또 다른 비석이 있었음을 짐작된다. 상석을 고인 고석은 사면에 귀면상이 양각되었다. 상석 앞에는 6각의 향로석이 놓이고  좌우에는 동자석이 향로석을 향해 마주 보고 서 있다. 차례에 앞에는 장명등이 놓이고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장명등의 하대석은 상다리를 안쪽을 휘어지게 했고 안쪽으로 연기문을 새겼고 중대석은 네 모서리에 원주의 우주를 새겼고 각 면에는 파련화를 새겼다. 상대석은 4면에 입을 크게 벌려 있는 모양의 안상을 새겼다. 그 위의 화창은 4면에 사각의 문을 내었고 지붕은 둔중하게 보이면서 4 귀의 추녀가 날개를 지쳐 올리고 팔작지붕의 형태를 띠며 사모각의 지붕 꼭대기에는 꽃이 피는 보주를 올렸다. 망주석에는 각각 세호가 돋을새김 되었는데 동쪽의 세로는 올라가는  모습, 서쪽의 세호는 내려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문인석은 관모를 쓰고 관목 차림에 두 손을 한데 모으고 홀을 잡고 있다. 홀은 턱 밑에까지 와닿으며, 관목의 후수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묘역 후면 우측에는 산신제(山神祭)를 지내는 석물과 묘역 우측 하단에는 제물(祭物)을 올릴 때 사용하는 판석이 놓여 있다. 묘역 내의 석물은 왕족의 무덤답게 균형미가 뛰어나고 조각 솜씨가 우수하다.

묘에서 남쪽으로 약 60m 앞에는 귀부와 비신, 이수를 갖춘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신도는 묘 앞에서 입구까지 낸 길을 말한다. 그 입구 앞에 세워놓은 비가 신도비이다. 우리나라 삼국시대부터 묘비를 세우기 시작한 것이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신도비를 세우는 것이 성행했는데 건원릉과 영릉 등 왕릉 앞에 세워졌고, 사대부의 경우에도 생전에 세운 공로가 인품을 기록하여 비석을 크게 세우는 사례가 많았다. 인평대군의 신도비도 그중에 속한다. 이 신도비는 1658년에 건립하였다. 비몸의 앞면의 비문은 의정부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이 짓고 의정부 좌참찬을 지낸 오준이 썼으며 인평대군의 처남 가산대부 이조참판 오정일의 전액과 함께 새겼고, 뒷면은 1659년에 새긴 부인 오씨의 비문이다.

 신도비의 귀부 머리

신도비의 귀부의 머리는 용의 머리를 하고 치켜들었다. 턱에서 내려와 가슴에 이르는 비늘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고 두 앞발을 접어 머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등에는 빗살무늬가 새겨져 있고 용두에서 내려오는 털이 양어깨를 덮은 모습을 하고 있다. 비신을 세우는 비좌는 연잎을 덮어놓은 모습으로 조각하여 매우 자연스러우면서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비좌 우에는 비신을 얹어 놓은 홈 사방으로 2단의 받침석을 모각하였다.

비신의 머리에는 ’인평대군 증시충경공 신도비명‘이라는 전액이 새겨져 있다. 이수의 정면에는 구름 속에서 2마리의 용이 서로 마주 보며 여의주를 쳐다보고 있는 형상이며. 동쪽의 용인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고 서쪽의 용은 입을 다물고 있다. 뒷면에는 한 마리의 용이 입을 다물고 여의주를 바라보고 있다. 중국의 문헌 ’광아(廣雅)‘에 묘사된 용은 “머리는 낙타를 닮았고 뿔은 사슴뿔을 닮았고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조개, 비늘은 잉어 비늘, 발톱은 매발톱,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고 비늘은 9·9 양수인 81개이고 입 주위에는 긴 수염이 나 있다.”라고 하였다.

전면의 두 마리 용중에 입을 벌려 ‘아(阿)’ 소리를 내고 또 한 마리는 입을 다물어 ‘흠(欠)’ 소리를 내고 있다. 두 소리가 합쳐야 비로소 완성된 소리가 된다. 시작과 끝, 생성과 소멸, 영혼과 완성, 성취를 뜻하는 ‘옴’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두 마리 모두 입을 다물거나, 입을 열면 ‘옴’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뒷면에 한 마리의 용은 완성의 ‘옴’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여의주를 지켜보고 있다.

이수에 새겨진 용의 발가락은 모두 3개이다. 한나라 고조 때 제왕과 제1, 2 왕자는 다섯 발가락의 용을 쓸 수 있었고 제3, 4 왕자는 4개의 발가락을 쓰도록 규정하였다. 훗날 중국 황제는 발가락을 5개의 용을 썼고, 조선 임금은 발가락을 4개, 일본은 3개의 발가락을 쓰도록 하였다. 우리나라도 황제국이라 하여 7개의 발가락을 가진 용을 사용했었다. 우리나라 3개의 발가락은 왕세손과 세손빈은 3조룡을 사용했으므로 인평대군의 신도비에도 3개의 발가락을 가진 용을 새겼을 것이다.

신도비에서 동쪽 편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한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은 판벽과 각 칸에 각각 2짝의 판문이 달려있고 상방에는 살창을 하였다. 좌우의 벽과 뒷벽은 하인방은 화방벽을 하고 중방과 상방은 살창을 하여 사방에서 안으로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비각 내에는 2기의 비가 세워져 있다. 비대석과 비신, 가첨석을 갖춘 같은 형태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이 두 비는 인평대군 치제문비(麟坪大君致祭文碑)이다. 체제문이란 공신이나 왕족이 죽은 후 제사 지낼 때 임금이 친히 지어내라는 제문을 말한다. 조선 역대 4분의 왕이 한 사람을 기억하며 치제문을 내리고 그것을 비로 세운 사례는 인평대군의 삶을 그 만큼 비범하다는 뜻이 담겼다.

‘麟坪大君遷葬時別遣右承旨致祭文(인평대군천장시별견우승지치제문)’이란 비문은 1693년(숙종 19)에 쓰고 1724년(경종 4)에 세웠다. 제1기 치제문비의 전면에는 1658년에 효종이 인평대군과 함께 심양의 찬바람을 함께 맞았던  동생을 잃은 슬픔을 되새기며 올린 글로 편지 글자에서 집자하여 새겼고, 후면은 1693년 숙종의 제문으로 이장할 때 직접 쓴 것이다. 손자 서평군 이요(李橈, 1687년~1756년)가 전액을 하고 그 내용을 양원근 이환(李煥, 1658년~1724년)이 추가로 기록했다.

비석의 몸돌은 1693년에 제작했다가, 1724년에 전액까지 더하여 완전한 비석으로 세웠다. 제2기의 치제문비는 상중하로 구분 지어 전액을 마련하여 전서했다. 상단은 1792년 영조 어제 어필 제문, 중단에는 1792년 정조 어필 제문, 하단에는 1825년 순조 어제 어필 제문 등의 순서로 새겼다.

정조의 제문 일부를 옮겨보면, “聖祖曰咨 咨予介弟(성조왈자 자여개제) 성조께서 이르시기를 아름답고 아름다운 내 동생이여! 提 備嘗 苦甘薺(제휴비상 고다감제) 맛있는 음식 갖추어 제단을 설하여 제사 지내느니라. 三棲瀋館 九渡鴨水(삼서심관 구도압수) 세 번씩이나 심양에 갔고 아홉 번씩이나 압록강을 건너셨네! 有事則前 國耳公耳(유사칙전 국이공이) 일이 생기면 앞장을 섰고 국가의 일이라면 먼저 하였다네 猾縮頸 虜 卷舌(제활축경 로책권설) 오랑캐 사나워서 목을 늘이고 오랑캐가 꾸짖어도 말이 없었지 保我耆舊 休我士卒(보아기구 휴아사졸) 우리를 보호하여 옛날처럼 즐기도록 하시었고 우리 군사 쉬도록 하시었네.” 인평대군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그의 사람됨을 왜 기억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떠올리지는 치제문이라고 할 것이다.

인평대군은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제자백가에도 정통하였던 그는《송계집》, 《연행록(燕行錄)》, 《산행록(山行錄)》의 저서를 남겼다. 한편 그림에도 상당한 솜씨를 보여 〈산수도〉, 〈노승하관도(老僧遐觀圖)〉, 〈고백도(古栢圖)〉 등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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